광복의 꿈을 이룬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나라는 분단이라는 또 다른 아픔과 마주해야 했다.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에게 씻을 수 없는 고통을 안겼던 그때의 상처는 아직까지 분단의 아픔으로 남아있다.
그저 시간이 멈춘 듯 푸른 숲속에 자취를 숨긴 채 우두커니 남아있는 공간이지만,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그리고 다시는 반복되지 말아야 할 한반도의 상흔이 강원도 화천에 머물러있다.
Photo_ 화천군청
우리의 힘으로 나라를 이끌 수 있다는 기쁨도 잠시, 미국과 소련은 광복 직후 일본의 식민지였던 우리나라를 점령하기 위해 한반도를 반으로 나눴다. 그렇게 만들어진 38도선을 중심으로 북쪽은 소련이, 남쪽은 미국이 장악하면서 우리나라는 또다시 분단의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분단의 이유는 이념이 다르다는 것이었다. 사람보다 이념이 앞섰던 시절, 북한군의 갑작스러운 남침을 시작으로 6·25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이 시작됐다.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은 38도선을 중심으로 건물을 건축해 남한의 북침을 경계하고 있었다. 강원도 화천 역시 38도선과 가까운 곳에 있어 6·25전쟁 당시에도 치열한 전투를 많이 치렀던 곳이다. 북한은 화천에 인민군사령부 막사를 지어 화천과 철원 일대를 군사적으로 관할했으며, 분단과 6·25전쟁을 겪으면서 곳곳에 전쟁의 상흔을 남겼다.
그렇게 분단과 6·25전쟁을 겪으면서 남과 북 모두가 지쳤던 상황, 유엔군 대표와 공산군 대표 간의 휴전 회담이 시작됐고 1953년 휴전 협정이 맺어지면서 새로운 군사분계선이 생긴다. 군사분계선은 38도선에 비해 서쪽 지역 일부가 북한으로, 동쪽 지역 일부가 남한으로 넘어온 상태로 그어졌다. 이후 인민군이 주둔했던 인민군사령부 막사는 남한의 공간이 되면서 1960~70년대에는 우리 국군의 피복 수선소로 이용되기도 했다. 그러다 한동안 방치되었고, 2002년 등록문화재 제27호로 지정되며 국방부의 소유가 됐다. 현재는 화천군수가 관리하고 있다.
도로에서 벗어나 경사진 언덕을 따라 올라가야 겨우 모습을 드러내는 이곳, 화천 인민군사령부 막사가 모습을 보인다. 돌로 지어진 단층 건물은 가로 길이가 긴 장방형으로 꾸밈없이 단순한 형태로 지어졌다. 건축 당시에는 시멘트 기와로 지어졌으며 공산군의 상징이었던 오각별이 지붕의 합각면에 새겨진 형태였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현재는 슬레이트를 얹은 박공지붕으로 이뤄져 있어 아쉽게도 오각별은 찾아볼 수 없다. 벽면은 네모난 화강암을 시멘트로 쌓아 올렸고 벽면과 지붕 사이는 벽면에 올렸던 화강암보다 좀 더 작은 화강암을 쌓아 올려 정면에서 바라보면 벽면과 지붕면이 확실히 구분돼 보인다.
건물 정면에는 아치형으로 된 문이, 옆면에는 좌우로 열리는 큰 문이 있다. 옆면에 정면보다 큰 문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전쟁에 필요한 물자 등은 옆문을 통해 드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화강암과 시멘트로 튼튼하게 마감한 덕에 지붕을 제외하고는 건물 원형의 모습이 비교적 잘 남아있어 당시 인민군의 생활 모습과 군 시설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현재 건물 안은 안전상의 이유 등으로 출입이 불가능하다. 창문을 통해 살짝 들여다볼 수 있는 정도인데, 시멘트 벽으로 칸막이가 쳐진 것으로 보아 용도에 따라 공간을 나눈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지나가는 이들만 잠시 발길을 머물다 가는 공간이 됐지만, 덩그러니 지어진 이곳에서 전쟁을 치렀던 수많은 이들의 상처와 슬픔만은 그대로 남겨져있다.
찾아가는 길 | 화천 인민군사령부 막사는 다목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도보로 20분 거리에 있다. 날이 좋다면 걷는 것도 좋겠지만, 다목 시외버스터미널에서 휴양소 앞까지 가는 버스를 타면 내려서 도보로 1분 내에 도착한다. |
주소 | 강원도 화천군 상서면 다목리 36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