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은 국군의 날, 한글날이라는 굵직한 기념일이 있는 달이다.
두 가지 키워드를 모두 충족하는 여행지로 파주를 선택했다.
분단의 상처를 극복하고 문화가 가득한 파주는 각기 다른 느낌이 공존하는 장소다.
하루 여행
분단과 문화가 공존하는
파주
전쟁의 상흔에서 평화의 상징으로, 임진각
파주는 아픔의 장소이자 문화의 장소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 접경도시인 파주는 분단의 상징인 군사분계선상의 판문점과 비무장지대, 그리고 전쟁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다. 이런 갈등과 대립의 기억을 간직하면서도, 문화와
예술의 공간으로도 매력을 지녔다. 다양한 출판사와 인쇄사가 모여 있는 출판단지와 갤러리, 박물관 등에서 예술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헤이리 예술마을이 있다.
먼저 분단의 상징적인 장소인 임진각을 방문했다. 임진각은 ‘임진강에 세운 누각’이란 뜻이지만, 임진각국민관광지와 임진각평화누리를 아우르는 말로 더 많이 쓰인다. 임진각은 1972년 북한 실향민을 위해 민간인 출입의
끝 지점에 세워졌는데, 군사분계선에서 약 7km 떨어져 있다. 2020년에는 임진각에서 민간인 통제구역까지 갈 수 있는 곤돌라가 개장했다. 곤돌라를 타면 민간인 통제구역에 들어가기에 보안서약서를 작성하고 신분증을 꼭
챙겨야 한다. 곤돌라를 타고 8분 정도 이동하면 갤러리 그리브스에 도착한다.
갤러리 그리브스는 원래 미군기지의 볼링장이었으나, 1997년 미군 철수 후 전시장으로 리모델링되어 전쟁과 관련한 전시들이 열리고 있다. 갤러리 외에도 전망대에 오르면 임진강 장단반도와 독개다리, 자유의 다리 등을
북쪽 방면에서 볼 수 있다.
임진각에서 6·25전쟁의 단면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경의선 장단역 증기기관차’다. 1950년 12월 31일, 연합군의 군수물자를 실은 열차가 중공군의 남하로 회차하며 장단역에 도착했다. 연합군은 기관차를
인민군과 중공군이 사용할 수 없도록 총을 난사했다. 이로 인해 열차는 파손됐고, 인민군은 철로를 막은 기관차를 탈선시켰다. 탈선한 자리에서 반세기 동안 녹슨 채로 방치되다가 2007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진 이
기관차는 전쟁의 참혹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 외에도 임진각에는 폭격으로 파괴됐다가 1953년 목교로 임시 복원된 자유의 다리와 2005년 세계평화축전을 계기로 조성된 평화누리공원 등이 있다. 자유의 다리로 1만
2,773명의 국군과 유엔군이 귀환했다. 평화누리공원에는 3,000여 개의 바람
개비가 돌아가며 평화의 메시지를 전한다. 현재 임진각은 아픔과 평화가 공존하는 공간이다.
카메라타의 선율 속으로
1990년부터 문화 예술인들이 하나둘 모여 만든 헤이리 예술마을은 2000년대 초반까지 허허벌판이었다. 지금은 300여 명의 다분야 창작자들이 공동체를 이룬 복합문화공간으로 변모했다. 다양한 주제의 박물관과
예술공간이 밀집한 곳에서 눈에 띄는 곳은 2004년 문을 열고 터줏대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는 황인용 뮤직스페이스 카메라타다.
네모난 두 개의 콘크리트 건물로 이루어진 카메라타는 음악 감상 전용 공간이다. 온전히 음악에 집중할 수 있는 곳으로, 오래전부터 음악 애호가들에게 찬사를 받아왔다. 카메라타를 운영하는 황인용씨는 1970~1980년대
‘밤을 잊은 그대에게’와 ‘영팝스’ 등의 라디오 DJ로 활동한 아나운서이다. 음악 애호가였던 그는 모아온 1만 5,000여 장의 LP와 대형 스피커 등 음악과 관련 있는 것들로 이 공간을 꾸몄다. ‘카메라타’는
이탈리아어로 ‘예술가들의 사교 모임’과 ‘작은 방’을 의미하는데, 이는 작은 공간에 모여 예술과 문화 이야기를 나누려는 그의 생각을 담고 있다.
입구를 찾는 잠깐의 고민이 무색하게, 건물 밖으로 새어 나오는 묵직한 음악 소리가 자연스럽게 출입구로 안내해 줬다. 육중한 문을 열고 들어서면 기둥이 하나 없는 넓은 공간이 펼쳐졌다. 의자들이 가지런히 앞을 향해
놓여 있어 마치 공연장을 연상시켰다. 전면에는 피아노와 1920~1930년대에 제작된 스피커가 비치되어 있다. 한쪽 벽면에는 강렬한 색상의 미술작품이 눈에 띄는데, 국내외에서 활발히 활동 중인 미디어 아티스트
빠키(Vakki)의 작품이다. 그의 거대한 기하학적 패턴은 음악의 리듬을 바탕으로 제작됐다고 하는데 이 공간과 잘 어울렸다.
방문 당시에는 L. 번스타인이 영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에서 작곡한 ‘심포니 댄스’가 흘러나왔다. 이곳의 음악은 날씨, 요일, 운영자의 기분에 따라 선곡된다고 한다. 방문자는 그저 세상의 번잡함을 내려놓고
오로지 음악에 몸을 맡기면 된다. 책 넘기는 소리, 커피 원두 갈리는 소리, 사람들의 속삭임, 따스하게 비치는 햇살을 즐기며 이 공간을 온몸으로 경험해 보시길 권한다.
유물을 가까이, 국립민속박물관 파주
국립민속박물관 파주가 새롭게 문을 열었다. 2021년에 개관한 박물관은 ‘개방형 수장고’를 전면에 내세워, 전통적인 박물관의 이미지와 다르다. 사전적 의미로 수장고는 ‘귀중한 유물을 안전하게 보관하는 창고’다. 박물관은
관람객은 접근할 수 없는 ‘금단의 공간’으로 여겨졌지만 최근 들어 이런 수장고들이 개방형으로 변모하고 있다.
국립민속박물관 파주는 두 가지 형태의 수장고를 갖추고 있다. 하나는 유리창으로 내부를 관찰할 수 있는 ‘보이는 수장고’, 또 하나는 직접 들어가서 유물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열린 수장고’다. 이곳에서는 14만
3,000여 점의 소장품과 99만 7,000여 점의 민속 아카이브 자료를 만날 수 있다. 박물관에 들어서면 1층에서 2층으로 이어지는 3개의 유리 타워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타워는 블록처럼 네모 박스가 쌓여 있는데,
그 속에는 유물들로 가득 차 있으며, 총 6개의 공간으로 나뉘어 있다.
유물들은 재질에 따라 구분되어 보관되는데, 빛, 온도, 습도의 영향을 적게 받는 도기, 토기나 석재, 유리로 만든 유물들이 유리 타워에 전시되어 있다. 유물마다 별도의 설명문이 부착되어 있지 않지만, 각 공간에
설치된 키오스크에서 검색할 수 있다. 2층의 민속 아카이브실은 기증자들이 제공한 사진, 음원, 영상 자료들로 보는 재미를 더했다. 디지털 영상으로 정보를 볼 수 있는 미디어 정보월도 주목할 만하다. 여섯 개의 스크린
벽면에 수천 장의 소장품이 사진으로 모자이크되어 있으며, 터치를 통해 유물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이런 국립민속박물관 파주는 전통적인 유물 보관 방식과는 다른, 새로운 형태의 개방형 수장고를 통해 유물의 ‘날 것’을 직접 만나볼 수 있다.
북적북적 출판단지
파주 하면 출판단지를 빼놓을 수 없다. 정식 명칭은 ‘파주출판문화정보산업단지’로, 1997년부터 민간 주도로 개발되어 300여 개의 출판사, 인쇄사, 디자인사 등이 모여 있는 책 문화의 중심지다. 이곳에서는
출판사들이 직접 운영하는 북카페와 야외 독서 문고 등 책과 관련된 다양한 문화 공간을 즐길 수 있다. 이번 여행의 마지막 여정으로 책과 인쇄를 동시에 경험할 수 있는 ‘지혜의숲’과 ‘활판인쇄박물관’을 선택했다.
지혜의숲은 천장부터 바닥까지 책으로 가득 차 있는 공간으로, 2014년에 출판도시문화재단이 가치 있는 책을 보존하고 관리하기 위해 조성한 복합문화공간이다. 이곳에는 국내외 학자들과 출판사들이 기증한 소설, 전문서적
등이 모여 있다. 누구나 빈자리에 앉아 원하는 책을 자유롭게 읽을 수 있는데 7m 높이의 개방감 덕분에 편안하게 책에 몰입할 수 있다.
지혜의숲의 지하에는 활판인쇄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다. 이 박물관에는 활판인쇄에 필요한 모든 장비와 시설이 갖추어져 있으며, 한글과 알파벳, 일본어, 한자, 약물 등 다양한 활자들이 보관되어 있다. 보관된 활자의
무게만도 17t이 넘는다. 이 활자들은 1960년대 전국 인쇄소에 활자를 공급하던 전주의 활자공장에서 옮겨온 것이다. 활판 인쇄기, 재단기, 접지기, 정합기, 압축기 등 인쇄 과정에 필요한 모든 장비가 모여 있으며,
방문객들을 위해 책갈피 제작, 활판 액자 만들기, 책과 노트 만들기 등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다.
국군의 날과 한글날이 있는 10월을 위해 떠난 파주. 임진각에서 분단의 아픔을 이해하고, 헤이리 예술마을에서 음악의 깊이를 느끼며,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전통의 새로운 시각을 얻었다. 출판단지에서는 책과 인쇄의 매력을
만끽했다. 파주에서의 순간들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아우르는 경험이다. 이곳에서 마주한 모든 풍경과 이야기는 우리가 기억하고 이어가야 할 소중한 가치들의 모임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