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사 속 인물

독도의 수호신이 된

홍순칠

10월 25일은 독도의 날이다. 독도가 대한민국의 영토임을 알리고,
대한제국 칙령 제41호 제정을 기념하는 날이다. 1900년 10월 25일 고종이 공포한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는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 섬으로 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독도의 날을 맞아 홍순칠 대장과 독도의용수비대의 나라사랑의 정신을 되새겨보고자 한다.

글. 박건호(역사작가)  
일러스트. 김성삼

홍순칠과 독도의용수비대

홍순칠(洪淳七, 1929∼1986)의 집안은 3대에 걸쳐 울릉도에서 살았다. 할아버지 홍재현이 울릉도에 자리 잡은 것은 1883년으로 강원도 강릉에서 이주한 후 대대로 자리를 잡은 셈이다. 당시 울릉도 주민은 두 가구뿐이었다. 할아버지는 어린 순칠에게 항상 독도는 우리 땅이며 울릉도의 속도인지라 울릉도 사람이 잘 보존해서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홍순칠은 1949년에 육군 독립기갑연대에 입대했다가 6·25전쟁 때 원산부근에서 심한 부상을 입어 오랜 병원 생활 후 4년 만에 울릉도로 돌아왔다. 돌아온 직후 그는 경찰서 마당 한쪽에 ‘島根縣 隱岐郡 五箇村 竹島(시마네현 은기군 오개촌 다케시마)’라고 쓴 길이 6척이나 되는 표목을 보게 된다. 한국이 6·25전쟁을 치르느라고 정신이 없는 틈을 타서 일본인들이 독도에 상륙해 자국영토 표식을 하고 간 것인데, 독도에 출어한 울릉도 어민들이 이를 발견해 뽑아온 것이었다. 경찰서장은 그 대응조치로서 일본 측이 세운 것과 같은 크기의 표시목을 제작 건립했다. ‘大韓民國 慶尙北道 鬱陵郡 南面 獨島(대한민국 경상북도 울릉도 남면 독도)’라고 쓴 표목이었는데, 이를 일본인이 세운 바로 그 자리에다 팻말을 꽂고 시멘트를 발랐다. 그런데 시멘트도 채 마르기 전에 일본 경비정이 독도에 상륙해 우리 측이 세운 표목을 뽑아가면서 재차 자국 영토란 표시를 했다. 팻말 바꿔치기는 그 후로도 몇 번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독도에서 수산물을 채취하고, 고기잡이하던 어민들이 일본 해상보안청 소속 PS함의 위협으로 작업을 중단하고 울릉도로 쫓겨 돌아오는 일도 여러 차례였다.

홍순칠은 이를 보고 분노가 끓어올랐다. 아예 독도에 주둔하면서 일본의 침입을 막아야겠다고 결심했다. 6·25전쟁 때 부상을 입고 귀향한 울릉도 출신 청년이 당시 40여 명 정도 됐다. 홍대장은 이들 중 30여 명을 규합해 독도의용수비대를 조직했다. 독도의용수비대는 ‘의용’이라는 명칭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대한민국의 정규군이 아니라 일종의 의병부대였다. 수비대원들은 경찰서장의 협조로 경찰이 가지고 있던 무기를 대여받아 합숙훈련을 했다. 경북 병사구 사령부에서 소총 몇 정과 권총, 경기관총 1정을 입수하고 부산 ‘양키’시장에서 바다사자 1마리를 대가로 권총과 소총도 어렵게 얻을 수 있었다. 드디어 독도에 주둔할 모든 준비가 끝났다. 홍순칠은 대원들에게 이렇게 외쳤다.

“문전옥답에 참새가 날아들어도 쫓아야 되거늘
화적 같은 일본놈이 독도를 침범하는 것을 어찌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보고만 있어야 하겠습니까?
우리 밭을 우리가 지키는데 백의종군하는 의병으로 동참합시다.
동지들! 독도로 가지 않겠습니까?”


대원들은 이에 호응했고, 오로지 독도를 지키겠다는 각오 하나만으로 그들은 언제 돌아올지 모를 장도에 올랐다.

독도대첩,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독도의용수비대가 독도에 상륙한 것은 1953년 4월 20일이었다. 아직 6·25전쟁이 채 끝나지도 않은 때였다. 독도에 상륙하자마자 그들은 태극기를 게양하고 애국가를 합창했다. 독도 상륙 당시의 장비는 경기관총 2정, M2 3정, M1 10정, 권총 2정, 수류탄 50발 그리고 현지에서 쓸 0.5t 보트 1척 등이 고작이었다. 보수는 생각할 수 없었고, 수비대에 지원되는 식량 등도 대부분 울릉도민의 기부로 충당됐다. 독도에서 사용한 이동용 보트 이외에 울릉도와 독도를 오갔던 삼사호라는 낡은 배도 한 척 있었는데, 그 배는 6t급의 오징어잡이 배로 수비대의 전함이자 유일한 보급선이었다. 당시 1,000t이 넘는 일본 해상보안청 소속 PS정과는 차마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독도에서의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모든 것이 열악했고 부족했다. 당장 물부터가 문제였다. 독도에서는 물이 나지 않았다. 최소한의 음료수와 밥 지을 물은 빗물로 쓰고 양치질은 짭짤한 바닷물로 대신했다. 모기보다 훨씬 독한 깔따구도 그들을 괴롭혔다. 게다가 그들이 주둔한 이듬해인 1954년 봄부터 독도 주변에 일본 해상보안청 소속 함정들의 출몰이 잦았고, 그 숫자도 늘었다. 방어 수단은 보잘 것 없었고, 무기도 부족했다. 총알은 금싸라기같이 귀해 아껴야만 했다. 그래서 대원들은 쉴 새 없이 바위를 깨고 구멍을 뚫고 굵은 철사로 정상에서 아래로 철삿줄만 자르면 바다까지 굴러 내려가게 하기 위한 장치를 만들기도 했다. 무기 부족을 해결한 방법 중 압권은 나무로 대포를 만든 것이었다. 무기가 부족한 상태에서 가짜 대포를 생각한 것이다. 1주일간의 작업으로 통나무를 이용해 목대포를 완성했다. 포구 직경이 20cm, 포신이 자유롭게 빙빙 돌고 미제 에나멜로 단장한 신형 대포였다. 당연히 실전에서는 사용할 수 없는 대포였는데, 이 목대포를 정상부에 진짜 대포처럼 꾸며 일본 함정들을 속였다. 후에 일본에서 발간되는 잡지에 ‘독도에 거포 설치’란 제목의 기사가 났는데, 수비대가 만든 가짜 대포를 일본 함정에서 망원경으로 찍은 것이었다. 이 목대포는 현재 울릉도에 있는 독도의용수비대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독도의용수비대는 총 여섯 번에 걸쳐 일본의 독도 침입을 막아냈다. 그 중 마지막이자 최대 규모의 충돌로 기록된 것이 1954년 11월 21일에 있었던 독도대첩이었다. 이날 독도의용수비대는 독도를 점령할 목적으로 접근 중인 1,000t급 3척의 일본함정 PS9·10·16함과 항공기 1대가 접근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독도수비대가 독도에 진주한 이래 최대 규모였다. 압도적 화력 차이 때문에 수비대원들은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일본 함정이 M 소총 사정거리에 들어왔다. 홍대장이 쏜 권총 신호와 함께 일제히 독도가 떠나갈 듯 총성이 울려 퍼지면서 전투가 시작됐다. 전투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용수비대가 쏜 박격포 초탄이 PS9함의 선수 부분에 명중했다. 일본 함정은 불의의 포격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하면서 PS16함에 구조요청을 했고, 이후 검은 연기를 뿜으며 예인됐다. 또한 중화기에 치명상을 입은 PS10함도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동쪽으로 철수했다. 독도 상공을 선회하면서 위협하던 항공기도 주변을 맴돌다 결국 물러갔다. 일본 NHK는 그날 정오 뉴스에 독도에서 한국경비대가 발포를 해서 일본 해상보안청 함정들이 피해를 보고 16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보도했다. 일본 정부는 즉각 한국 정부에 항의각서를 제출했고, 독도 우표가 첨부된 모든 우편물을 일본에서 한국으로 반송시켰다.

이 땅이 뉘 땅인데!

1956년 12월에서야 대한민국 정부는 해양수비대를 독도에 파견했다. 6·25전쟁이 휴전되고 3년이 지난 후였다. 이로써 홍순칠과 독도의용수비대의 의병활동은 종지부를 찍었다. 홍순칠과 독도의용수비대가 독도를 수호한 것은 1953년 4월부터 1956년 12월까지 총 3년 8개월, 달 수로는 44개월간이었다. 그 기간 동안 그들은 독도를 지키기 위해 고난을 감수하고 난관을 극복했다. 독도를 지키는 사명을 국립경찰에 인계하고 독도를 떠날 때 마지막까지 남은 대원은 33명이었다. 공교롭게도 3·1운동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도 33인이었다. 어찌 보면 그들도 다른 의미의 민족대표 33인이었다. 그들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나라사랑을 실천한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들의 공로를 인정해 1966년 홍순칠에게 근무공로훈장, 수비대원들에게 방위포장을, 다시 1996년에는 이미 고인이 된 홍순칠에게는 보국훈장 삼일장을, 수비대원들에게 보국훈장 광복장을 수여했다. 1986년 홍순칠은 지병인 폐암으로 서울보훈병원에서 별세했다. 그가 별세한 후 약 10년이 지난 후 그의 수기가 책으로 출간됐다. 제목은 《이 땅이 뉘 땅인데!》였다. 수기에서 그는 자신이 독도의용수비대를 조직해 독도에 간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사랑’이란 것이다.
한 인간이 크게 인류를 사랑한다. 또 이웃을 사랑한다. 나무를 사랑한다. 어머니가 아기를 사랑한다.
그런데 우리들은 분명 내 나라를 사랑하고 이 독도를 내 아내, 아들딸보다 우위에 놓고
나라사랑 때문에 독도란 외딴 섬에서 고생을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