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하인드

역사를 바꾼 총

총은 군의 가장 기본이 되는 무기지만 획득과 관리가 쉬운 편이어서 무장 테러 조직은
물론 범죄자들도 흔하게 사용한다. 그런데 중화기 이상의 무기와 비교하면 위력이 강하지 않아서
전쟁의 승패를 좌지우지하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역사를 바꾼 엄청난 도구가 되기도 한다.
다음은 그런 사건의 주인공이 됐던 총들에 관한 이야기다.

글. 남도현(군사칼럼니스트)

데린저와 링컨

부스가 링컨 암살에 사용한 데린저 ©포드극장 서부영화를 보면 종종 호신용으로 여성들도 쉽게 사용하는 손바닥 크기의 작은 권총이 등장한다. 미국의 헨리 데린저가 1825년에 만든 뇌관식 소형이 시초인데, 이후 등장한 이런 종류의 작은 권총을 데린저라고 통칭한다. 하지만 유효사거리가 5m 내외에 불과하고 정확도나 파괴력도 형편없어 무기로써 성능은 사실 낙제점에 가깝다.

하지만 이런 장난감 같은 권총이 역사를 바꾼 적이 있었다. 1865년 4월 14일, 노예제 폐지를 반대하고 남북전쟁 당시에 남부를 지지했던 배우 존 부스가 포드 극장에서 연극을 관람하던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뒤에 몰래 침입한 후 뒤통수에 한 발의 총탄을 발사했다. 이때 부스가 저격에 사용한 무기가 바로 데린저였다.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끈 링컨이 그렇게 생을 마감하면서 깊게 갈렸던 북부와 남부의 골을 메우려는 그의 비전도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분노한 북부 급진파의 주도로 이후 12년간 남부를 군정 통치하는 식의 차별이 가해졌지만, 남북 화합을 강조했던 링컨의 유지 덕분에 미국은 대대적인 보복 없이 상처를 수습하고 국가 발전에 매진할 수 있었다.

FN M1910과 페르디난트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 암살에 사용한 FN M1910 ©위키피디아 1910년, 벨기에의 총기 제작사인 FN은 휴대와 사용이 편리하도록 크기와 무게를 줄이고 발사 메커니즘을 단순화한 FN M1910 권총을 개발했는데, 출시와 동시에 많은 인기를 끌었다. 이후 독일의 발터 PPK 권총, 소련의 마카로프 권총의 탄생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고 1983년까지 계속 생산됐을 만큼 상업적으로도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FN M1910이 그 이상으로 유명하게 된 이유는 제1차 세계대전 때문이다.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를 방문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를 세르비아계 민족주의자인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이 권총으로 암살했다. 그리고 한 달 후, 전 유럽이 편을 나누어 4년 동안 1,000만 명이 죽어간 무서운 전쟁을 시작했다.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의 양자 대결로 끝날 사건이 왜 세계대전으로 비화했는지는 지금도 논쟁거리다. 물론 이처럼 거대한 전쟁은 이미 많은 갈등 요소가 쌓여있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만일 이 사건이 없었다면 그때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한마디로 프린치프의 FN M1910은 거대한 기름 탱크에 던져진 불쏘시개였다.

카르카노 M38과 케네디

케네디 암살에 사용된 오스왈드의 카르카노 M38 ©위키피디아 1963년 11월 22일, 전 세계로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했다는 엄청난 뉴스가 타전됐다. 댈러스에서 카퍼레이드하던 중, 인근 건물 6층에서 날아온 총탄에 절명했을 만큼 암살범 리 오스왈드의 사격은 상당히 정확했다. 그런데 저격에 동원된 총은 정작 20세기 전반기에 사용된 주력 소총 중 가장 평판이 좋지 않았던 이탈리아제 카르카노 M38이었다.

19세기 말이 됐을 때 제국주의 열강들은 군의 가장 기본인 소총은 국산으로 무장하는 것을 당연시했다. 그러나 카르카노는 당시 이탈리아의 기술력 부족으로 경쟁국 소총보다 성능이 뒤졌다. 그럼에도 자존심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 때까지 이탈리아군의 주력으로 억지로 사용됐고 전후 도태됐다. 그러한 2류 소총이 엄청난 사건의 주인공이 된 것이었다.

당시 오스왈드는 2초 동안 세 발을 발사한 것으로 조사됐는데, 카르카노는 그 정도로 연사가 쉽지 않고 더구나 차로 움직이는 목표를 정확히 연속 타격하기는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다. 따라서 제2의 저격범, 음모론 같은 여러 주장이 아직도 회자 되고 있다. 어쨌든 이 사건으로 그저 그런 평가를 받던 카르카노는 일약 명성을 얻었다.

AK-47과 사다트

사다트 저격 당시의 모습 ©NBC뉴스 제4차 중동전쟁을 일으키기도 했던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의 1977년 전격적인 이스라엘 방문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는 대화를 통해 중동에 평화를 가져오고자 했고 이듬해 이집트는 이스라엘과 국교를 수립했다. 대부분 찬사를 보냈지만 정작 아랍 세계에서는 그를 배신자로 매도했고 특히 국내 반이스라엘 세력의 불만이 컸다.

1981년 10월 6일, 이집트군의 군사 퍼레이드 도중 이슬람 원리주의자인 칼리드 이슬람불리와 공범들이 대열을 이탈해 연단의 사다트를 향해 돌진하며 37발의 AK-47 소총탄을 난사했다. 이 공격으로 사다트는 TV로 생중계되는 가운데 현장에서 사살됐다. 이제 중동에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은 더 이상 없을 것이라 생각하던 세계인들은 경악했다.

AK-47과 그 파생형은 개발국 소련을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 지금까지 약 1억 정 정도가 생산된 역사상 가장 많이 만들어진 총이어서 갱단까지도 애용할 정도다. 하지만 사다트 암살 사건만큼 AK-47이 세계사 격동의 순간에 자리했던 적은 없었다. 많이 만들어졌고 평판도 좋았던 소총이라는 명성에 비한다면 오히려 의외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