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자, 특허 출원을 받다
길이를 재려는 인류의 노력은 문명의 시작과 함께했다. 약 3,000년 전 고대 인도에서 눈금 있는 자가 사용된 흔적이 발견됐다.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도 나무, 금속, 돌로 만든 자가 건축과 토지 측량에 쓰였는데, 이는 당시의 정교한 건축물과 농업 시스템을 가능하게 했다. 중국에서는 진시황제가 기원전
200년경, 혼란스러웠던 전국 시대를 통일하며 도량형을 표준화했다. 이때 사용된 길이 단위인 ‘척(尺)’은 국가 표준이 됐고, 다양한 형태의 자가 통일된 규격으로 생산됐다. 우리나라 역시 일찍부터 다양한 재료로 자를 만들어 썼는데, 대나무, 나무, 화각(소뿔), 나전 등은 모두 조선시대 이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자의 재료였다. 당시 자는 건축, 의복 제작, 공예 등에서 중요한 도구였다.
하지만 전통적인 자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직선거리는 쉽게 잴 수 있었지만, 사람의 몸처럼 유기적인 곡선이나 유연한 형태를 측정하기는 어려웠다. 바로 이 지점에서 줄자가 등장한다.
줄자의 시작은 19세기 중반 프랑스였다. 줄자를 발명한 사람은 프랑스 황실의 재단사였던 알렉시스 라비뉴(Alexis Lavigne).
그는 나폴레옹 3세와 외제니 황후의 옷을 만들면서, 인체의 복잡한 곡선을 더 정확하게 잴 수 있는 도구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기존의 딱딱한 자로는 불가능했던 신체 굴곡 측정이 가능한 도구, 그것이 바로 줄자였다. 라비뉴는 천이나 리본처럼 부드러운 재질에 미터법 눈금을 새긴 줄자를 고안해 냈다. 이는
재단사들의 작업 방식을 혁신적으로 바꿔놓았다. 이전에는 천을 몸에 직접 대고 재거나 여러 번 피팅을 거쳐 수정해야 했던 맞춤복 제작이 줄자를 통해 훨씬 더 정밀하고 효율적으로 변했다. 줄자는 곧 유럽 전역의 재단사들 사이에 빠르게 퍼지며 중요한 도구가 됐다. 패션계에서는 그 방법이 현재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지금처럼 자동으로 말려 들어가는 줄자는 19세기 후반 미국에서 나타났다. 1868년, 미국의 앨빈 펠로우(Alvin J. Fellows)는 스프링이 내장된 철제 줄자를 고안하고 특허를 등록했다. 버튼을 누르면 줄자가 자동으로 감겨 상자 안으로 들어가는 구조는 현대 줄자의 기본 모델이 됐다. 내구성과 휴대성을
모두 갖춘 이 형태는 건축, 목공, 재단은 물론 일상생활에까지 널리 퍼져 지금도 가장 보편적인 길이 측정 도구로 쓰이고 있다.

마라톤 거리는 왜 42.195km일까?
마라톤 하면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전설이 있다. 때는 바야흐로 기원전 490년. 아테네에서 북동쪽으로 약 40.2km 떨어진 마라톤 평야에서 아테네군과 페르시아군이 맞붙었다. 병력 규모는 아테네군이 약 1만 명, 페르시아군은 무려 10만 명. 전력 차이는 컸지만, 아테네군이 어렵게 승리를 거두게
된다. 기쁨에 찬 아테네군은 이 소식을 전하기 위해 한 병사를 급파한다. 그가 바로 페이디피데스. 그는 마라톤에서 아테네까지 죽을힘을 다해 달려와 시민들에게 “기뻐하라, 우리가 승리했다!”라는 말을 남기고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둔다. 이 극적인 이야기를 기념하기 위해 올림픽 육상 종목에 마라톤이 생겼고, 그가
달렸다는 거리가 마라톤의 공식 거리로 정해졌다는 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 전설에는 허점이 많다. 마라톤 전투를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남긴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비롯해 고대 문헌 어디에도 이 이야기와 같은 내용은 없다. 이런 전설이 처음 등장한 것도 전투가 일어난 지 수백 년이 지난 기원후 2세기 무렵이다. 게다가 페이디피데스라는 인물 자체도 조금 수상하다. 고대
기록에는 그가 마라톤 전투의 전령이 아니라 아테네에서 스파르타까지 약 200km를 이틀 동안 달려가 원군을 요청했던 인물로 나온다. 그런 사람이 고작 40.2km를 달리고 죽었다는 건 납득하기 어렵다. 또 하나, 애매하게 끝나는 이 거리. 왜 하필 42.195km일까? 이를 이해하려면 1896년,
제1회 근대 올림픽이 열린 아테네로 돌아가야 한다. 당시 마라톤 경기는 전설에 나오는 마라톤 평야에서 아테네 중심까지의 거리인 약 40km를 기준으로 치러졌다. 이후 대회 때마다 마라톤 거리는 개최국 사정에 따라 조금씩 달라졌다. 그러다 1908년, 런던 올림픽에서 전환점이 생긴다. 당시 마라톤
출발선은 윈저성, 결승선은 런던 화이트 시티 스타디움이었다. 이 코스를 정하는 데엔 영국 왕실의 힘이 작동했다. 왕실 측이 윈저성 동쪽 발코니에서 출발 장면을 보고 싶다고 하자, 출발 지점을 성 앞으로 옮겼고, 결승선도 왕실 관람석이 있는 자리로 조정되면서 원래 42km였던 거리에 195m가
더해졌다. 그렇게 지금의 42.195km가 처음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때도 이 거리가 공식이 된 건 아니었다. 이후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에서는 40.2km, 1920년 안트베르펜 올림픽에서는 42.75km 등 국가마다 마라톤 거리가 계속 달랐다. 결국 1924년 파리 올림픽을 앞두고 문제가
제기됐다. 대회마다 거리가 제각각이다 보니 선수 기록을 공정하게 비교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에 국제육상경기연맹(IAAF)은 공식 거리를 정하기로 했고, 런던 올림픽에서 쓰인 42.195km를 기준으로 삼았다. 이 선택에는 정치적 배경도 있었다. 당시 영국은 스포츠 규범과 올림픽 운영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만든 마라톤 거리가 곧 세계 표준이 됐다. 이런 과정으로 오늘날까지 마라톤은 정확히 42.195km로 정해졌다.

나폴레옹은 정말 키가 작았을까?
“내 키는 땅에서 재면 가장 작지만, 하늘에서 재면 가장 크다.” 19세기 초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의 말이다. 키가 작다는 세간의 평가에 유머러스하게 자신을 조롱하면서도, 야망과 자신감을 드러낸 말로 읽힌다. 나폴레옹은 오랫동안 ‘작은 키’의 대명사로 불렸다. 급기야 키 작은 사람들이 가진 열등감을 지닌
심리 상태를 뜻하는 ‘나폴레옹 콤플렉스’라는 표현까지 등장할 정도니, 그의 키는 작다는 인식이 상식처럼 굳어져 있다.
그런데 나폴레옹은 정말 키가 작았을까? 여기엔 몇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있다. 먼저, 그가 활동하던 당시 프랑스와 영국은 전쟁 중이었다. 영국은 나폴레옹의 이미지를 깎아내리기 위해 다양한 선전 수단을 동원했는데, 그중 하나가 그를 왜소하고 우스꽝스럽게 그린 풍자만화였다. 이런 이미지가 대중에게 퍼지면서
그의 키는 점점 더 작게 인식됐다. 또 하나는 상대적인 문제다. 나폴레옹은 키가 180cm가 넘는 근위병들과 함께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작아 보일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결정적인 것은 단위의 오류였다.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나폴레옹의 키는 157cm. 이 수치는 그의 부검 당시 기록된
5ft 2in를 영국 야드파운드법 단위로 환산한 결과다. 여기서 중요한 건 당시 프랑스는 영국과는 다른 단위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프랑스의 1피에(pied)는 약 32.48cm로, 영국의 1ft(30.48cm)보다 길다. 또 프랑스는 인치 대신 ‘푸스(pouce)’라는 단위를 썼다. 이를 기준으로 다시 계산하면, 나폴레옹의 키는 약 170cm 정도가 된다. 당시 프랑스 성인 남성의 평균 키가 164cm였던 것을 고려하면 그는 오히려
평균보다 큰 편이었다. 그러니까 나폴레옹은 키가 작다기보다는 단위 해석의 오류와 이미지 조작의 희생자였던 셈이다.
이와 반대지만, 비슷한 오해를 겪은 사례가 동양에도 있다. 바로 관우다. <삼국지연의>에서는 관우를 ‘신장 9척에 수염 길이 3척’이라 묘사하고 있다. 현대 기준으로 1척을 30cm로 잡으면, 키는 270cm, 수염 길이는 90cm가 된다. 현실성 없는 수치다. 하지만 관우가 살던 후한 말 당시 1척은
약
23cm였다. 이를 기준으로 환산하면 관우의 키는 약 207cm, 수염은 69cm 정도가 된다. 물론 여전히 큰 키긴 하지만, 신화적인 숫자는 아니다. 함께 등장하는 장비의 키는 8척(약 184cm), 유비는 7척 5촌(약 172.5cm) 정도로, 삼형제 모두 당시 기준으로는 꽤 장신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단위 하나 차이로도 이미지가 달라진다. 숫자는 정확하지만, 그 숫자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누군가는 땅꼬마가 되고, 누군가는 거인이 된다.

종이에도 길이가 있다
전자책으로 책을 읽는 사람들은 ‘책 크기’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하지만 오프라인 서점에 가보면 책의 크기가 다양하다는 걸 금세 알 수 있다. 책이 아니더라도 프린터 용지만 보더라도 종이마다 규격이 다른 걸 알 수 있다.
흔히 볼 수 있는 프린터 용지 A4, B5 같은 표기 속 알파벳은 ‘계열’을 뜻한다. 여기에 붙는 숫자는 크기를 나타내는데, 숫자가 클수록 종이는 작아진다. 모든 기준은 숫자 0부터 시작하며, A0와 B0가 각 계열의 기준이 된다.
먼저 A계열을 살펴보자. 가장 큰 A0 종이를 반으로 접으면 A1이 된다. A1을 또 반으로 접으면 A2, A2를 접으면 A3, 그다음이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A4다. 접을 때는 항상 긴 변을 반으로 접는데, 이렇게 접히면서도 종이의 비율은 항상 일정하게 유지된다. 이 비율은 ‘1:√2’. 다시 말해, 긴
변을 반으로 접었을 때 생기는 짧은 변이 다음 종이의 긴 변이 되는 구조다. A0는 넓이가 정확히 1㎡가 되도록 만들어졌으며, 가로×세로 길이는 841×1,189mm다. A4 용지는 210×297mm 크기다.
B계열도 종이를 접어 크기를 줄이는 방식은 같지만 기준이 다르다. B0는 짧은 변이 정확히 1m고, 긴 변은 √2배인 약 1.414m다.
이후 B1, B2, B3처럼 차례로 절반씩 접어가며 크기를 줄인다. 참고할 점은 우리가 쓰는 B규격이 국제표준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일본식 B규격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 규격은 같은 1:√2 비율을 유지하면서도 ‘넓이’ 기준이 다르다. 국제표준 B0가
1㎡라면, 일본식 B0는 1.5㎡다. 따라서
크기도 더 크다. 일본식 B0의 가로×세로는 1,030×1,456mm다. 이 기준은 일본 전통 종이인 ‘미농지’에서 유래한 것으로, 우리나라는 이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A나 B계열과는 다른 종이 규격도 있다. 바로 ‘국판’이다. ‘국(菊)’은 국화를 뜻하는데, 그 유래가 조금 독특하다. 과거 일본의 한 출판사가 미국에서 수입한 종이를 신문 및 출판용으로 판매하려던 중에 해당 종이의 상표에 국화과의 꽃인 달리아 그림을 상표로 사용했다. 일본에서는 이 종이를 ‘국화가 그려진
판형’이라는 의미로 ‘국인판’이라 불렀고, 이후 ‘국판’이라는 명칭으로 자리 잡았다. 이 말은 우리나라로 그대로 전해졌다. 과거의 국판은 ‘국전지’(939×636mm)를 16등분한 크기, 즉 152×218mm를 의미했다. 하지만 한국산업규격(KS)이 A0 기준을 채택하면서 현재는 A5(148×210mm)를
국판으로 사용하고 있다. 국판의
2배 크기는 ‘국배판’이라 부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