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비파형동검일까?
우리 역사의 첫 장을 여는 고조선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유물은 바로 비파형동검이다. 이름은 낯설지만, 이 한 점의 청동 무기가 고조선이라는 한민족 최초의 국가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고조선이 단순히 곰과 호랑이가 인간이 됐다는 신화가 아니라 실존했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바로 청동검과 청동거울이다. 특히 비파형동검은 고조선이라는 국가의 존재를 실질적으로 드러내 주는 가장 중요한 증거다. 그런데 왜 비파일까? 고고학자들은 처음 발견되면 그와 연상되는 이름을 붙이곤 한다. 1960년대에
이 동검이 처음 알려졌을 때 학자들의 머릿속에는 고구려와 돈황의 벽화에서 선녀들이 타는 비파라는 악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파형동검은 러시아에서는 ‘바이올린형 동검’, 영어권에서는 ‘만돌린형 동검’이라고 번역됐다. 나라마다 연상되는 악기가 달랐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세계 어디에도 쉽게 볼 수 없는
물결이 치는 듯한 날을 지닌 비파형동검은 단순히 무기 이상이었다. 그것은 공동체의 권력을 상징하고, 제사의 도구가 됐으며, 새로운 기술과 네트워크를 보여주는 혁명적인 발명이었다. 퍼렇게 녹이 슬어 박물관의 전시실 한 귀퉁이를 차지하는 이 유물 속에서는 고조선의 시작과 그로부터 이어지는 우리 무기의 역사가
숨어있다.
유라시아에서 전래된 청동기술로 태어난 칼
비파형동검을 만든 고조선의 청동기 기술은 중국과는 아예 다르다. 그들은 유라시아 초원에서 내몽골 동쪽을 거쳐 발해만으로 들어온 청동기술에서 시작됐다. 이곳은 예로부터 중국 농경 문화와 북방 유목 문화가 맞닿아 부딪히던 접경지였다. 이런 접경지에서 사람들은 새로운 청동기술을 받아들여 중국과는 다른 독특한
자신들만의 청동기문화를 만들었고 그 중심에 바로 비파형동검이 있었다.
비파형동검은 그 칼날이 물결을 치듯 하는 독특한 모양이다. 이것은 단순하게 디자인의 아름다움을 위해 만든 것이 아니다. 상대적으로 무른 청동기로 칼을 찌를 때에 깊숙이 박혀서 휘어지는 것을 방지하는 용도이다. 실제 비파형동검의 앞쪽 절반은 칼날이 날카롭게 갈려있지만 돌기부터 시작해서 손잡이 쪽으로는 칼날을
따로 갈지 않았다. 다소 무른 청동을 이용해서 최대한 살상효과를 내기 위한 방법이었다.
또한 청동칼을 만드는 데에는 장인들의 노하우가 필요하다. 청동은 구리와 주석을 일정한 비율로 합금하는 고도의 기술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정교한 기술을 가진 집단을 관리하고 재료를 공급하는 사회이어야 한다. 구리를 캐내는 광산, 주석을 구하는 교역망, 제련을 담당하는 숙련된 장인 집단, 그리고 그것을
사용하는 귀족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전시장에서 덩그러니 전시된 비파형동검 한 자루에는 그 수많은 사회 시스템이 숨어 있다. 비파형동검이 고조선을 대표하는 칼이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비파형동검은 무기인 동시에 권력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제사의 도구이기도 했다. 칼을 든 이는 공동체를 지배할 힘을 가진 전사였을 뿐 아니라 하늘과 소통하는 제사장이기도 했다. 흔히 비파형동검의 기원은 단순한 무기의 발명이 아니라 국가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고조선에서 남해안까지
비파형동검은 발해만 서쪽에서 태어나 곧장 요동과 한반도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고고학자들이 확인한 출토 사례만 해도 수십 건에 달한다. 한반도에서는 현재까지 60여 점 이상의 비파형동검이 발견됐는데, 대부분은 고인돌과 같은 무덤 속에서 발견됐다. 족장이 죽으면 후손들은 빛나는 청동검을 죽은 이의 손에 쥐여
주며, 무덤 앞에서 하늘에 제를 올렸을 것이다. 검은 단순히 무기의 역할을 넘어 영혼을 인도하는 신성한 도구로 여겨졌다.
고조선을 대표하는 만주의 선양시 정가와자 유적에서는 다수의 비파형동검과 청동거울이 함께 출토됐다. 많은 학자는 이곳이 고조선 초기 귀족이나 왕족의 무덤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청동검과 청동거울은 한 세트처럼 묻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권력과 신성이 결합된 상징체계의 흔적이다. 칼은 전사의 힘을, 거울은
신과 교류하는 제의적 능력을 의미했다.
다만, 한 가지 주의할 점은 비파형동검이 발견됐다고 모두 고조선은 아니라는 점이다. 고조선뿐 아니라 한반도 일대, 특히 남해안 지역에서도 널리 발견됐다. 당시 만주와 한반도는 오늘날 국경처럼 뚜렷이 구획된 공간이 아니었다. 사람과 물자가 끊임없이 오갔고, 청동검은 그 교류의 흔적을 남긴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청동검-청동거울 네트워크’로 고조선과 한반도의 남한은 연결됐다. 특히 한국에서는 남해안가를 따라 고인돌에서 많이 발견된다. 아마 바다를 통해 고조선과 이 지역 사람들이 서로 교류한 흔적일 것이다. 이렇듯 비파형동검은 단순한 무기가 아니라 고조선과 한반도를 연결한 문화적 키워드이기도 했다.
2,300년 전 고조선의 무덤인 인자춘 유적 청동칼을 손에 쥐고 있다. Ⓒ조선유적유물도감
중국 산둥반도에서 출토된 비파형동검과 유사한 동검들
무기, 기술, 제사의 상징
비파형동검은 고조선 사회에서 단순한 무기가 아니라 무기, 기술, 제사의 상징이라는 세 가지 얼굴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먼저 무기로서의 비파형동검은 돌이나 나무로 만든 도구에 익숙하던 집단에게 전혀 다른 차원의 위압감을 주었다. 실제 전투에서 길이가 짧고 살상력이 제한적이었다 해도 청동으로 반짝이는 칼은
상대에게 심리적 공포를 불러일으켰고, 전쟁의 결과를 바꾸는 상징적 힘을 지녔다. 이는 고조선이 주변 집단과 대립하고 중국 연나라 같은 강대국과도 대등하게 맞설 수 있는 배경이 됐다. 기술적 측면에서도 비파형동검은 고도의 사회적 조직과 장인의 정교한 기술력을 전제로 한다. 구리와 주석을 합금해 단단한 칼날을
만들려면 광산 개발, 장거리 교역, 정련 기술, 숙련된 장인 집단이 필요했다. 한 점의 청동검은 공동체가 이미 자원을 관리하고 역할을 분담하는 복합적 체계를 갖춘 사회였음을 입증하는 기술적 증거였다. 동시에 비파형동검은 제사의 도구였다. 많은 검이 무덤 속에서 거울과 함께 출토되는 것은 단순한 전투 도구가
아니라 권력자의 신성한 권위를 드러내는 제의적 물건이었음을 보여준다. 시베리아 샤먼들이 지금도 칼과 거울을 신과 소통하는 도구로 쓰듯, 고조선 지배자들도 청동검을 통해 하늘과 소통하고 권위를 과시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처럼 전사에게는 전쟁의 무기였고, 장인과 공동체에게는 첨단 기술의 산물이었으며,
지배자에게는 제사의 상징이었던 비파형동검은 고조선 사회의 정체성을 집약한 상징물로 기능했다. 바로 이 다층적인 의미 덕분에 비파형동검은 고조선의 대표적 상징으로 자리 잡았고, 오늘날에도 한국 고대사의 기원을 설명하는 핵심 유물로 남아 있는 것이다.
고조선 건국의 비밀 병기
그렇다면 실제 무기로서의 비파형동검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 비파형동검은 대체로 30~40cm 내외로 짧은 칼에 불과하다. 하지만 손잡이를 따로 만들어서 끼워야 하기 때문에 실제로 사용할 때는 50cm 정도까지 길었다. 같은 시기 중국 북방과 스키타이의 유목전사들이 사용했던 칼은 손잡이를 포함해서 30cm
정도에 불과했다. 상대적으로 열악했던 청동제련기술 속에서 손잡이를 따로 끼우는 조립식을 활용해 당시 동아시아에서 가장 긴 청동칼을 만들었던 것이다. 청동은 철에 비해 단단하지 못하고, 고조선 지역은 주석을 구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으니 중원지역처럼 거대한 청동기를 만들지 못했다. 하지만 그러한 핸디캡을 딛고
가장 최적화된 동검으로 만든 게 바로 비파형동검이다.
고조선이 기원전 4세기 무렵 중국 연나라와 전쟁을 벌였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연나라에는 진개라는 장수가 있었다. 그는 흉노에게 일부러 포로로 잡혀서 선진적인 군사기술을 익힌 후 다시 연나라로 돌아와 장수가 됐다. 당시 고조선이 연나라의 국경을 침범해 어지럽히자 진개는 고조선을 침략해 커다란 피해를 줬다고
한다. 실제로 연나라와 고조선의 충돌은 고고학적으로도 증명이 됐다. 그 시기 고조선의 무기인 비파형동검과 그 이후에 쓰인 세형동검은 하북성 일대의 연나라 무덤에서 실제로 종종 발견되곤 한다. 물론 이 연나라의 비파형동검이 실제 진개가 일으킨 전쟁 과정에서 수입된 전리품이었는지 알 수 없다. 적어도 연나라의
귀족과 전사들이 자신의 무덤으로 가져갈 만큼 비파형동검은 연나라와 대항했던 고조선을 상징하던 요소였음은 분명하다.
오늘날 비파형동검은 국립중앙박물관과 여러 지방 박물관 전시에 자리하고 있다. 관람객들이 보는 것은 녹슬고 변색된 작은 청동 조각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속에는 고조선을 만든 사람들의 꿈과 두려움, 권력과 신앙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얼핏 보면 보잘것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 칼이 가진 의미는 너무나 크다.
지금 거대한 전투기와 항공모함이 등장하는 시대지만 정작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는 작은 드론과 마치 온라인 오락을 하는 게이머들 같은 교묘하고 빠른 손놀림으로 무기를 파괴하는 시대로 바뀌고 있다. 작은 청동무기 비파형동검을 통해 우리는 고조선에서 현대로 이어지는 무기의 발달, 그리고 그 뒤에 숨어있는
역사를 느껴본다. 한편으로는 한국 최초의 국가 고조선의 상징으로 작지만 강력한 무기로 무장했던 고조선의 숨결을 느껴보는 가장 좋은 도구가 아닐까.
중국 선양 정가와자에서 발견된 고조선 귀족 또는 전사의 무덤.
비파형동검과 여러 마구가 함께 발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