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아람

VOL 105

JANUARY · FEBRUARY 2021
홈 아이콘 Add Culture 고마운 선조의 유산

화려한 불꽃, 심장이 뛴다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33호 함안낙화(落火)놀이

낙화놀이라기에 진주의 유등축제와 같은 광경을 상상했는데, 훨씬 역동적이었다.
불꽃이 튀고 어둠을 하얗게 밝히는 축제. 심장의 박동이 빨라졌다.

Photo_ 함안군청,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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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한기를 이용해 즐기던 대동제

경남 함안이라는 땅은 다소 낯설다. 좀처럼 알려진 여행지도 아니고 미식가의 군침을 돌게 할 음식도 찾기 어렵다. 함안은 동서로 의령과 창원을 이웃하고 있고, 위로는 창녕 아래로는 고성이 자리하고 있는 지역이다. 지금이야 ‘창원’이라는 도시로 통합됐지만, 과거에는 아래로 마산과도 인접해 있었을 테다. 주변 지역의 이름을 톺아보면 한 가지씩 제각기 유명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데, 함안은 그렇지 않다. 전형적인 농촌이다. 그런 함안의 자랑이라면 역시 낙화놀이. 사월 초파일 즈음에 함안으로 사람이 모여드는 이유다.

불을 주제로 한 축제는 전국에 꽤나 많다. 불빛이나 등을 이용한 축제들이 대부분이다. 시끌벅적한 축제의 열기와 달리 축제의 몸통은 정적인 분위기여서 주로 사진으로 그 순간을 남기려는 이가 많이 찾는다. 함안의 낙화놀이에 눈길이 가는 건 그 때문이다. 이 축제는 꽤 화려하다. 물 위에 늘어진 수백 개의 심지에 불이 붙으면 제 수명을 다할 때까지 타닥거리며 불꽃을 내뿜는다. 그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낙화놀이라는 이름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물 위로 떨어지는 수천, 수만 개의 불꽃이라니. 이렇게 화려한 축제가 또 있을까 싶을 만큼 장관이 펼쳐진다. 역시 입에서 입으로 소문이 나는 것에는 그만한 까닭이 있는 법이다.

낙화놀이의 정확한 시원은 알려진 바가 없다. 17세기 조선 중엽에 시작된 것으로 추정한다. 조선 선조대에 이 지역의 군수였던 정구가 최초로 창시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기록 상으로 함안의 낙화놀이를 찾아볼 수 있는 건 함안군수였던 오횡묵이 쓴 <함안총쇄록>이다. 그는 1890년, 1892년 사월초파일에 열린 이 축제를 보고 일기처럼 적어 놓았다. 내용을 보면 당시 낙화놀이는 함안읍성 전체에서 행해졌다고 쓰고 있다. 사람이 얼마나 몰렸는지 산 위에서 구경할 정도로 대규모였다는 대목도 나온다.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 경상남도편에도 이 축제를 언급하고 있기는 하다. 여기에서는 낙화놀이를 조선시대 서생들이 시회를 열 때 곁들이던 놀이의 하나로 소개한다.

고마운 선조의 유산02 심지에 불이 붙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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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이 끊겼던 일제강점기

함안의 낙화놀이는 괴항마을을 구심점으로 삼고 있다. 이 마을은 세조의 왕위찬탈에 항거에 함안의 백이산으로 내려온 조려 선생을 시조로 한 함안 조 씨의 집성촌이다. 이 마을이 자발적으로 낙화놀이를 즐겼다고 알려져 있다. 이때의 낙화놀이 모습을 잘 기록해 둔 것이 앞서 이야기한 오횡묵의 <함안총쇄록>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낙화놀이는 논매기를 마친 후 사월 초파일, 7월 7일(칠석), 7월 15일(백중)에 행했다. 그러나 비용이 적잖게 들어가는 관계로 부정기적으로 2~5년에 한 번씩 꽤 큰 규모로 열렸다.

낙화놀이를 준비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재료는 숯이다. 숯을 빻아서 낙화를 만들기 때문이다. 축제 때가 되면 마을사람들은 마을 안쪽의 골짜기에 있는 괴산리 기와가마에서 기와를 굽고 난 숯을 줍거나 얻어왔다고 한다. 이것을 빻아서 낙화를 만들었다.

이 전통은 1909년을 마지막으로 한동안 그 맥이 끊긴다. 1910년부터 일제가 강압적으로 민족문화 말살을 시작한 탓이다. 그 뒤로 광복을 이룬 1945년까지 함안에서는 낙화놀이의 맥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1946년, 마을주민 고 이근조 씨와 김형규 씨가 낙화놀이를 재개하자고 목소리를 높이면서 1946년에 비로소 부활할 수 있었다. 그때에도 괴산리 기와가마에서 숯을 얻어서 낙화를 만들다가 1960년대에 김형규 씨가 숯 굽는 법을 배워 직접 숯을 만들기 시작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반드시 참나무로 숯을 만들어야 한다는 점. 참나무로 만든 숯이어야만 낙화가 잘 탄다는 이야기가 마을 어른 사이에서 구전으로 전해오고 있었고, 이를 따라서 전통을 복원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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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을 붙이고, 흥을 돋우고

행사가 시작되기 전, 흥겨운 풍물놀이가 펼쳐진다. 별다른 절차와 순서가 없던 시절의 마을 대동제는 흔히 그랬다. 두드려 울리는 리듬의 조화는 심장을 요동치게 한다. 모두가 한데 어울려 춤을 추고 함께 함성을 지르며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낙화놀이도 그랬다. 1985년 함안문화원이 낙화놀이를 복원·재구성하면서 행사의 절차가 다듬어지고 고유제가 들어가 천지신명에게 고하는 순서를 거치게 됐다. 이 시기를 거치면서 축제는 비로소 전통문화의 원형을 보존하면서 현대적인 감각을 조화시켰다는 평을 얻게 됐다.

이후로 낙화놀이는 일정한 형식을 갖추게 됐다. 화천농악단이 풍물을 치며 관객을 한자리에 모은다. 관객은 어울렁더울렁 춤을 추면서 잡기를 쫓아내고 모두가 축제의 주인이 되는 과정을 거친다. 사물놀이를 하면서 250미터의 연단 주위를 돌면서 지신밟기를 하면 대중은 한목소리로 농악단을 따라 복창하고 행렬을 이룬다. 소원성취를 기원하고 제자리로 돌아와 정돈하면, 함안지역의 사령신명에게 화합 및 풍년을 기원하는 제를 올린다. 군중이 본인의 이름이 쓰인 봉축등 앞에 서서 일제히 낙화봉에 점화를 하면 이 축제는 절정으로 향해 간다. 낙화 500여 개가 불꽃을 쏟아내며 타들어간다. 마치 눈보라가 휘날리듯, 물 위로 폭죽이 쏟아진다. 하늘 높이 치솟는 불꽃놀이와는 다른, 물을 향해 쏟아지는 대규모의 폭죽은 그 자체로 또 다른 장관이다.

2008년부터는 함안의 낙화놀이도 새로운 장을 맞이하게 됐다. 그해 10월 30일,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된 것. 이제는 경상남도 차원에서 관심을 가지고 이 축제를 널리 알리고 키워가는 숙제가 남았다. 함안의 마을 축제에서 시작했지만, 조선 중엽부터 이어져 온 전통이 보여주는 희열은 세계 어느 유명 축제와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쏟아지는 낙화의 화려함, 심장을 요동치게 만드는 희열은 경험해 본 이만 알 수 있는 것이다. 내년 봄, 온 강산에 꽃이 만발하는 시기가 오면 함안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지. 경남 함안을 새롭게 발견하는 기회가 될 테니 말이다.

고마운 선조의 유산05 1963년 낙화놀이 기념사진

고마운 선조의 유산06 낙화놀이 축제에 참가한 관광객 현재 낙화봉을 제작하는 마을 주민들

“쏟아지는 낙화의 화려함, 심장을 요동치게 만드는 희열은 경험해 본 이만 알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