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진 흙반죽을 쌓았다. 문지르고 어루만져 벽을 만들고 그 위에 다시 흙무더기를 얹는다.
온 힘을 다해 두드리고 만지는 사이, 어느새 달항아리의 선을 가진 옹기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전남 강진의 칠량면은 옹기로 유명한 마을이다. 예로부터 이곳에는 옹기장이가 많았다. 바닷가 마을인 덕에 만들어 놓은 옹기는 배를 타고 온 상인에게 팔았고, 상인들은 배를 타고 바다를 따라 닿을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 되팔았다고 한다. 그 옛날 섬에 기대어 살던 사람도 부족함 없이 옹기를 쓸 수 있었던 연유다.
이 마을에서는 칠량면이 옹기가 처음 발원한 곳이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 진위를 따지기는 쉽지 않았으나 그렇게 이야기할 만한 배경은 여럿 보인다. 칠량면에서 조금만 내려가면 고려청자의 요지인 대구면이다. 불과 몇 킬로미터 거리다. 그만큼 이 일대에서 나오는 흙은 도기나 그릇을 빚기에 좋았다.
강진을 대표하는 옹기장 정윤석 선생은 여기서 중요한 차이 하나를 짚어냈다. 같은 흙이지만, 옹기를 빚는 흙은 또 다르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흙 속에는 흙만 있는 게 아니에요. 만져보면 미세한 모래알이 많이 섞여 있거든. 기계를 동원해서 아무리 잘 걸러도 모래를 다 걸러내지는 못해요. 그런 흙을 쓰는 거죠. 만들어서 말리고 유약을 발라서 가마에 일주일씩 구워냅니다. 그러면 옹기가 수축하면서 흙속의 모래알이 밀려 나와요. 그 과정에서 그릇에 숨구멍이 만들어지는 거죠. 유약을 발랐으니 물이 새지는 않아도 숨구멍이 있어 안에 보관해둔 음식이 상하지 않고 발효할 수 있게 하는 겁니다. 도자기에 쓰는 흙은 물에 풀어서 모래를 다 제거해 버립니다. 그러니 숨구멍이 없는 거고요.”
옹기라고 다 똑같은 옹기는 아니다. 장독이라고 다 똑같은 장독도 아니고 용도에 따라 생김새가 다를 뿐 아니라 지역에 따라서도 많은 차이가 존재한다. 정윤석 선생은 “만드는 방법부터 100퍼센트 다르다”라고 힘주어 말한다. 칠량면에서 만드는 옹기는 ‘쳇바퀴 타래미’라 부르는, 흙반죽이 핵심이다. 벽돌처럼 빚어놓은 이 반죽을 응달에서 말려 수분을 적당히 날리고 이것을 땅에 내려치며 늘려서 사용한다. 사람의 힘과 지구의 중력을 적절히 응용해서 만들어낸 이 반죽은 마치 판자처럼 옆으로 늘어나는데, 그럼에도 지나치게 무르지 않아 모양을 잡기에 용이하다. 이 반죽으로 바닥을 만들고 그 위에 다시 반죽을 쌓고 문질러서 옹기 벽의 두께를 잡아 올리며 빚는 게 칠량 옹기의 특징이다.
“가마에 불을 땔 때 옹기 위에 옹기를 겹쳐 쌓아 넣어요. 아래쪽 옹기가 그 무게에 눌려서 찌그러지지 않으려면 옹기를 빚을 때부터 윗부분과 아랫부분을 두껍게 만들어줘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지나치게 무겁지 않게 해야죠. 그게 옹기 만드는 사람의 기술이에요. 모르는 사람은 똑같이 빚지만, 가마에 넣으면 풀썩 주저앉아 버립니다. 이게 하나만 무너지면 괜찮은데 넘어지면서 다른 옹기까지 함께 망쳐버리니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지요.”
그는 애초에 좋은 흙을 구하는 것도 비결이라고 말을 더했다. 똑같은 사람이 만들어도 흙이 다르면 결과물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이다. 모래도 섞여 있어야 하지만 차진 흙과 파실파실하게 흩어지는 흙도 적당한 비율로 잘 섞여 있어야 좋은 옹기를 빚을 수 있단다. 이 배합 비율을 알아보는 안목을 갖추는 게 무척 중요한데, 칠량면의 면사무소 뒤편에 이런 흙이 아주 많다고 했다. 이 마을이 옹기로 유명해진 이유를 다시 한 번 짐작케 하는 부분이다.
옹기를 만드는 반죽인 쳇바퀴 타래미
완성된 옹기의 겉과 속을 살피는 정윤석 옹기장
“1989년 쯤 되니까 이 마을에 옹기 만드는 집이 딱 두 곳 남아 있더라고요. 그러다 나머지 한 집마저 옹기 일을 접어 버리고 그 이후로는 나만 남은 거죠. 할 줄 아는 게 이것밖에 없어서 억척같이 버틴 것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옹기 만드는 일이 귀해지고 이 기술을 후대에 전할 책임이 생긴 거예요.”
현재 그가 만든 칠량봉황옹기는 그의 셋째 아들 정영균 씨가 잇고 있다. 그 역시 옹기 만드는 일만 30년째다. 이제는 아버지보다 더 뛰어난 손재주로 좀처럼 보기 어려운 커다란 옹기를 빚기도 한다.
“셋째가 뒤를 이어주니 다행이죠. 옹기가 처음 발원한 마을에서 옹기의 전통이 더 이상 이어지기 어려운 상황이 됐으니 이 얼마나 귀한 선택입니까. 손자가 그 뒤를 다시 이어줄지는 모르겠어요. 그게 늘 아쉽죠. 이 마을에서 나마저 손을 놔버렸다면, 달항아리처럼 유려한 선을 가진 칠량 옹기의 역사는 끊어졌을 거예요. 언제라도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제 아들이 여러 가지 실험을 거듭하면서 새로운 옹기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도 그런 이유인 거고요.”
아들 정영균 씨는 요즘 전통 옹기도 만들지만 색을 천차만별로 바꾸어 가면서 새 길을 여는 중이다. 그나마 긍정적인 변화가 조금씩 엿보이는 건, 써 보니 옹기가 먹고 보관하는 데 있어서는 최고라는 인식이 다시 돌아오고 있는 것 같다는 점. 이제는 옹기 가격이 만만치 않은데도 찾아오는 이가 꽤 많아졌다.
정윤석 선생의 바람은 하나다. 후손이 대대로 이 일을 이어주었으면 하는 것. 다른 이도 다시 전통 옹기의 맥을 이어서 예전처럼 옹기 만드는 마을의 명성을 되찾았으면 하는 것.
저 단순한 흙반죽이 둥그스름한 옹기가 될 때까지, 정윤석 선생은 자기의 생명을 나누어서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고 있었다는 걸. 옹기는 필사의 힘을 다해 빚어 생명을 불어넣은 그릇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