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산으로 연결된 세계
푸른 바다와 하얀 해변, 그리고 활화산이 있는 섬, 그곳에서 보헤미안의 자유로움을 만끽한다.
글. 정효정 여행작가
인도네시아는 세계 최대 규모의 섬나라다. 공식적으로 존재하는 섬만 1만 8천 200개, 그 면적을 합치면 한반도의 9배에 이른다. 섬이 많은 만큼 그 문화도 다양하다.
인도네시아 인구는 약 2억 5천만 명이며 자바족, 순다족, 마두라족 등 총 300여 민족이 742개의 지방어로 소통한다. 인구 구성이 다양하다 보니 국가 공인 종교만 해도
카톨릭, 불교, 이슬람, 힌두교, 개신교, 유교 등 총 6개에 이른다. 재미있는 건 이 모든 종교의 축일이 국가 공휴일이다. 그래서 부럽게도 공식 설날만 4번이다.
인도네시아는 그 다양성만큼 미래 발전 가능성도 높다. 세계 4대 인구대국인데다, 전기차 시대에 핵심 광물인 니켈을 비롯해 목재, 팜유, 가스 등 원자재가 풍부하다. 현재
아세안(ASEAN, 동남아시아국가연합)의 의장국으로, 아세안 10개 회원국 가운데 유일하게
한국과 특별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맺고 있다. 특히 대한민국과 인도네시아는 2015년부터 한국형전투기 사업인 KF-21 차세대 전투기 개발을 함께 추진하고 있기도 하다. 올해
1월 5일 KF-21 시제 3호기가 최초 비행에 성공했으며, 1월 17일엔 KF-21 시제 1호기가 4만 피트 상공에서 첫 초음속 비행에 성공하는 쾌거를 올렸다.
인도네시아는 수많은 섬만큼 다양한 관광지를 지니고 있다. 신혼여행지로 각광 받는 발리, 야생 오랑우탄이 살고 있는 수마트라, 자바 섬의 고대문명이 살아 숨 쉬는
욕야카르타(족자카르타) 등이 전통적인 명소다. 한편, 최근 소셜 미디어와 방송 등의 영향으로 급부상한 관광지가 있다. 바로 롬복(Lombok)과 롬복에 속한 부속섬인 길리
아일랜드(Gili Island)다.
롬복은 그동안 발리의 유명세에 가려져 지금껏 ‘발리의 옆 섬’ 정도로 소개되어왔다.
실제로 비행기로 30분, 페리로 2시간이면 도착할 정도로 가깝다. 하지만 롬복은 단순히 발리 옆 섬으로만 소개되긴 아까운 곳이다.
사실 이 섬은 그동안 발리를 떠난 여행자들의 도피처였다. 발리의 상업화에 지친 여행자들이 깨끗한 자연을 찾아 떠난 것이다. 롬복은 발리의 30년 전 모습이라고 한다. 발리와
비교하면 롬복의 가장 큰 매력은 바닷물의 색이다. 발리와 달리 섬 전체에 에메랄드빛 바다가 투명하게 빛난다. 깨끗한 모래사장도 청량감을 더해준다.
롬복 공항을 중심으로 섬의 남쪽에는 서핑으로 유명한 쿠타 해변이 있고, 서쪽에는 검은 모래사장으로 유명한 셍기기 해변, 북쪽에는 인도네시아에서 2번째로 높은 활화산인 린자니
산이 있다. 그리고 섬의 북서부에는 길리 아일랜드라고 불리는 세 개의 섬이 있다. 길리 아이르(Gili Air), 길리 메노(Gili Meno), 길리 트라왕안(Gili
Trawangan)인데, 이중 길리 트라왕안이 2017년 tvN 예능프로그램 <윤식당>의 배경이 되었던 섬이다.
길리 아일랜드에는 자동차나 오토바이 등 동력을 사용하는 이동수단이 없다. 섬 전체가 청정지역이다. 그래서 여행객들은 조랑말이 끄는 마차인 ‘찌도모(cidomo)’를 타거나
자전거, 혹은 도보를 이용해 여행한다. <윤식당>의 배우 정유미가 자전거를 타고 섬을 달렸던 장면이 탄생한 배경이다. 자동차가 없다고 걱정할 건 없다. ‘길리’란 현지어로
‘작다’란 뜻이다. 세 섬 중 가장 큰 섬인 길리 트라왕안도 자전거로 약 한 시간이면 전체를 둘러볼 수 있을 정도로 아담하다.
세 섬은 모두 각자의 매력이 있다. 여행자들은 주로 길리 트라왕안에서 머물고, 상대적으로 차분한 분위기를 선호하는 이들은 길리 아이르나, 길리 메노에 숙소를 잡는다.
길리 트라왕안은 다른 섬에 비해 숙박시설이나 레스토랑도 많고, 여행자를 위한 편의 시설도 잘 갖춰져 있다. 동쪽엔 주로 레스토랑과 클럽, 숙박업소가 많고, 서쪽은
상대적으로 조용하고 분위기 있는 선셋 포인트가 많다. 세 섬 중 가장 흥겨운 분위기다. 밤에는 매일 야시장이 서고, 해변에선 대규모 파티가 벌어진다. 방송으로 익숙한
‘윤식당’은 섬의 동북쪽에 있다. 그 지역은 거북이가 자주 등장하는 지역이라 하루 종일 스노클링하기도 좋은 곳이다.
길리 메노는 여행자를 위한 편의시설은 적지만, 최고의 스노클링 포인트들이 있는 섬이다. 이곳엔 ‘터틀스 헤븐’이라는 포인트가 있는데 70년 이상 된 거북이와 함께
느릿느릿 바닷속을 헤엄치는 경험이 가능하다. 또 다른 인기 포인트는 인스타그램에서 유명한 바다 속 조각상이다. 프리 다이버들은 바다속 깊이 잠수해 조각상과 함께
아름다운 사진을 남긴다. 마지막 포인트는 난파선이다. 이 난파선은 1999년에 가라앉은 배인데, 수심 12~18m에 사이에 위치해 어떤 레벨의 다이버라도 접근할 수
있다.
길리 아일랜드 여행의 매력은 특유의 보헤미안 정서에서 온다. 낮에는 자전거를 타고 천천히 섬을 둘러보거나 지칠 때까지 스노클링을 하고, 저녁엔 일몰이 아름다운
서쪽으로 이동해 숯불에 구운 랍스터나 사테(꼬치구이)를 먹으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밤에는 해변가 바에 들러 인도네시아 맥주 빈탕을 손에 들고, 전 세계 여행자들과
함께 흥겨운 파티를 벌이기도 한다. 밤의 바다는 더욱 달콤한 향을 지니고 여행자를 매혹시킨다. 이런 자유로움은 휴양지의 섬에서만 만끽할 수 있기에, 길리 아일랜드의
매 순간이 더욱 소중하게만 느껴진다.
조랑말이 끄는 마차인 ‘찌도모’
길리처럼 차가 없는 작은 섬에서
중요한 교통수단인 찌도모는
고무타이어가 달린 말 마차다.
생김새와 다르게 속도가 꽤 빠르다.
길리 아일랜드에서 어느 정도 시간을 보냈으면, 롬복으로 건너와 린자니 산 트레킹을 해보길 추천한다. 해발 3726m의 린자니 산은 최근에도 활동 중인 활화산이다. 가장 최근 분화는 2016년도였다. 해발 2000m 지점엔 거대한 칼데라호인 세가라 아낙 호수가 있는데, 그 호수 안에 작은 분화구가 또 있다. 1990년대의 분화로 생긴 구눙 바루다. 린자니 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검은 화산재가 뒤덮여 있어 난이도가 높은 편이다. 하지만 정상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면 태초에 자연과 함께 벅찬 감동이 밀려온다.
롬복의 생활상을 알고 싶으면 사삭 빌리지를 방문할 수 있다. 이곳은 롬복 인구의 80%를 차지하는 사삭 부족이 살고있는 곳이다. 이들은 코코넛나무로 기둥을 만들고 볏짚으로
지붕을 얹은 전통가옥에 산다. 마을에선 관광객을 위해 무술공연을 펼치기도 한다. 나무 막대기와 가죽 방패를 든 옛 전사들이 제법 매서운 대련을 펼친다.
이들 사삭 부족이 믿는 종교는 이슬람의 한 분파인 사삭 이슬람이다. 주민 중에는 힌두교도나 불교도도 있다. 서로 다른 종교 때문에 분쟁이 있을 법도 하지만, 이들에겐 평화를
지키는 비결이 있다고 한다. 그 비결은 바로 프랑토팟(Perang Topat)이라는 축제다. 프랑토팟은 랑사르 사원에서 매년 11월에서 12월 사이 열리는 일종의 추수감사절
행사다. 18세기에 세워진 이 사원은 힌두교 사원이지만, 이 거대한 사원의 내부에 이슬람 사원도 존재한다. 그래서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는 추수감사절에 서로에게
토팟(Topat)이라고 불리는 코코넛 잎에 싼 떡을 던지는 전투를 벌인다. 이때 꽃과 떡이 빗발치는 광경을 보기 위해 많은 관광객이 이곳을 방문한다. 이 가짜 종교전쟁을
통해 이들은 두 종교 간의 신을 속이며, 다음 해의 풍요를 기원한다고 한다. 이렇게 롬복 사람들은 꽃과 떡을 통한 전쟁으로 종교 간의 긴장과 갈등을 해소한다.
다름은 차이기도 하지만 다양성이기도 하다. 차이는 갈등을 만들지만, 다양성은 유연함을 불러온다. 여행이 끝나면 매사에 갈등이 많은 도시인의 삶으로 돌아간다. 어차피 치러야
하는 일상 속 전투라면, 최대한 평화로운 방법으로 해치우는 방법은 없을까? 롬복의 사람들이 꽃과 떡을 던지며 갈등을 축제로 만드는 것처럼 말이다. 인도네시아에서 다양성이
주는 가능성에 흠뻑 빠져들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