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군사툰

1880~1904 무기편

새로운 군대에는 새로운 무기가 필요했다

제국주의 열강들이 전 세계에 자국의 깃발을 꽂으며 식민지 쟁탈전을 벌이고 있을 때, 조선 역시 위협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 그리고 1875년 운요호 사건으로 말미암은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은 여러 차례 전투를 치러왔고, 더 이상 재래식 화기로 서구 열강을 막아내기 어렵다는 점을 경험했다.

글. 김기윤   그림. 우용곡, 초초혼, 금수, 판처

M1883 개틀링 기관총
조선은 1884년 말부터 미국의 중개무역회사인 하트포드 사와 접촉하여 6문의 M1883 개틀링 기관총을 구매했다.
이후 조선 왕조가 멸망하기까지 30문 이상 운용되어 주력 포병장비로 사용됐다.

자국의 안위를 보장받고자

조선은 개항 이전 강화도 조약으로 전쟁을 치르면서 일본과 청나라로부터 각종 신식 군사 장비 도입에 집중했다. 그러나 일본과 청의 세력다툼이 진행됐고, 1882년 임오군란과 1884년 갑신정변까지 이어지면서 조선은 원하는 무기 도입 시기를 뒤로 미뤄야만 했다.

1885년이 되자 비로소 조선은 새로 조직된 군대에 제식화기를 도입할 수 있었으며, 이때 낙점한 것이 미국에서 생산된 ‘레밍턴 롤링블럭’이었다. 이미 1884년을 시작으로 1885년에도 추가 구입을 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미국 장비의 도입은 조선 정부가 추구했던 대미 정책과도 연관이 있었다.

당시 조선은 일본과 청에서 벗어나 자체적인 근대화 노력을 기울이고자 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파트너로 미국을 염두에 두었다. 조선은 미국으로부터 군사교관단을 지원받아 신식 군대를 청과 일본의 영향력으로부터 배제하고 그를 통해 자국의 안위를 보장받고자 했다. 이에 따라 레밍턴 롤링블럭 소총 4,000정과 탄약 수십 만발이 제물포항을 통해 수입되었으며, 더불어 ‘M1883 개틀링 기관총’도 미국으로부터 도입됐다.

청일전쟁 이후 새로운 군사 파트너, 러시아 그리고 베르단 소총

흥미롭게도 1888년 12월 31일, 미국 공사관 서기 샤이에 롱(Chaillé-Long)이 고종과의 대담에서 탄약 구경에 대한 통일, 즉 제식화기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실제로 ‘45-70 Govt. 탄약’으로 일원화를 시킨 바 있었다. 이는 조선이 세간의 인식과 달리 탄약 규격에 대한 정보가 있었던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듯 개항 초기 일본과 청의 입김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은 미국제 장비 도입과 깊숙이 연계되었음을 알 수 있는 점이다. 그러나 군이 폭발적으로 증강되던 1890년부터 기존의 미국제 화기 도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고, 이에 따라 독일제 화기들도 도입되기 시작했다. 가장 가까운 청나라에서 생산한 ‘Gew71 소총’이 조선에 제공됐다. 당시 청나라에서는 독일의 ‘마우저 소총’이 자체 생산되고 있었고, 조선은 탄약과 부수 물자 도입이 용이한, 지리적으로 가까운 청으로부터 2,000여 정의 화기가 1894년 6월까지 입수됐다. 천진기기국(중국의 근대화 군수공장, 天津機器局)으로부터 M1841 곡사포 그리고 M1879 크루프 6cm 산포 등 포병 장비 역시 함께 이때 도입됐다. 당시 조선에 있어서 가장 큰 화포 공급 국가는 바로 청나라였던 것이다. 하지만 청일전쟁을 거치면서 서해를 통한 청으로부터 무기 공급이 끊기자 조선은 새로운 군사 파트너를 찾아야만 했으며, 그것이 바로 러시아와 ‘베르단 소총’이었다. 러시아는 1895년 군사교관단 파견을 준비하는 동시에 당시 오데사 군구(Military district)에서 모신나강(소총)과 교체된 베르단 소총을 조선에 제공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3,000여 정의 소총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선으로 향하는 배에 선적됐다.

베르단 소총은 탄약 공급이 어려운 미국제 레밍턴 롤링블럭 등을 대신하여 일시적으로 제식화기로서 운용되었으나, 러시아의 한반도 진출을 우려한 영국과 일본이 지속해 이를 방해했다.

군사교관단을 1898년 이후로 끝내 철수시키면서 칭제건원(稱帝建元)을 알린 대한제국의 입장에서는 자국의 군대를 새롭게 개편하고, 또 증강할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1896년 6,000명 규모의 자국군을 1898년 러시아 군사교관단 철수 이후 9,800명 수준으로 늘렸으며, 1902년에 들어서서는 편제상 18,000명에 달하는 수준까지 증강됐다.

당연하게도 이러한 군대를 무장시킬 장비 역시 새롭게 요구됐다. 러시아마저도 대한제국의 안전보장을 해줄 수 없는 것이 니시-로젠 협정으로 드러나자, 이번에는 러시아와 동맹을 맺으며 영국-일본 동맹을 견제하던 프랑스가 대한제국의 새로운 ‘짝사랑’ 대상이 됐다.

자주국 천명과 국권을 지키기 위한 무기 도입과 군대 확장

대한제국은 의화단 운동에 대비해 프랑스로부터 10,000정의 Gras Mle 1874 소총을 도입하는가 하면, 아시아의 군사적 모델로서 추종하던 일본으로부터 동일 수량의 30년식 소총을 구매하기도 했다. 대한제국의 소총 구매 등의 노력은 자국의 방위력을 증강해 자주독립을 유지하고자 한 것이었으나 1904년 러일전쟁은 이러한 시도를 모두 수포로 만들었다. 물론 대한제국 역시 프랑스와 독일로부터 소총 5~70,000여 정을 도입하여 전쟁에 대비하려 했지만 모두 실패했고, 이후 군사력의 해체 수순으로 이어지게 됐다. 현대에 이르러 구한 말 시기 무기 도입에 대한 비판에는 군수보급은 염두에 두지 않고 마구잡이로 도입했다는 부분이 많다. 하지만 자국을 지키기 위해 새로운 군대를 모집하고, 규모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사용할 수 있는 장비를 가능한 확보한다는 건 격변하던 세계에서 자주국임을 천명하고 국권을 지키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특히 영일동맹이 대한제국의 무기 수입을 방해하고, 심지어 영국인 세무사가 장악한 해관에서 압류까지 되는 과정을 본다면, 1890년 이후의 무기 도입은 이러한 부조리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으로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1
게베어 71 소총

마우저 Gew71 소총은 독일 제국이 드라이제 소총의 후속작으로 도입하였으며, 조선 조정은 1893년과 1894년에 걸쳐 2,500정의 Gew71 소총을 무상으로 청으로부터 공여받아 사용했다.

2
그라스 소총

프랑스군이 샤스포에 이어 1874년부터 배치한 제식 소총이다. 조선은 1889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일부 물량을 무상으로 공여받아 공사관 경비대 등에서 운용한 바 있었다. 이후 대한제국 시기 10,000정을 구매하여 한성에 배치된 친위대와 시위대에서 사용하도록 하였다.

3
레밍턴 롤링블럭 소총

조선에서는 1883년 나가사키의 America Trading Company를 통해 4,000여 정을 주문했고, 1884년 6월에 도착하였다. 이후 조선군의 주력 소총으로 사용되었으며, 이후에도 여전히 훈련용 혹은 경찰용으로 사용되었다.

4
30년식 소총

일본군이 사용한 아리사카 소총 시리즈의 시작이며 1897년에 제식으로 채용되었다. 대한제국은 미쓰이 물산을 통해 10,000정의 30년식 소총을 구매했으며 이후 용산 군기창에서 생산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대한제국의 중앙군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총기였다.

글쓴이, 그린이
한국 군대와 군사를 다룬 <타임라인M>을 출간했다. 김기윤 작가는 문헌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우용곡, 초초혼, 금수, 판처 그림 작가는 사료의 정확함을 살려 군사사의 뿌리를 탐구한 내용을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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