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약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 지 일 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군을 물리치고 베를린으로 진격했던 영광이나 종전 이후 냉전의 한 축을 담당했던 러시아군의 권위는 이제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이, 전쟁 역시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아직 긴장을 풀 때가 아니다.
글. 백승만 교수_경상국립대학교 약학대학
이번 전쟁에서 마지막까지 긴장을 풀 수 없는 수많은 이유 중 하나는 화학무기가 아직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장에 사용된 지 백 년을 지나 21세기 전쟁에서도 여전히 화학무기는 위력을 떨치며, 사용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가령, 2013년 시리아 내전 당시 시리아 정부군이 화학무기를 사용한 사실이라던가, 러시아가 직접적으로 관련된 2020년 ‘알렉세이 나발니 중독사건’을 예로 들 수 있겠다. 사사건건 푸틴의 발목을 잡고 정권의 부패를 폭로하던 나발니는 항공기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 이후 밝혀진 원인은 독극물 중독. 시리아 내전 당시 쓰였던 화학무기와 같은 계열의 물질이었다. 다행히 비행기가 긴급 착륙하고 독일 의료진의 도움을 받아 나발니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날 수 있었다. 물론 러시아 정부는 관련성을 부인하고 있다. 이렇듯 이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화학무기가 사용된다면, 상대편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1988년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자국민을 대상으로 화학무기를 사용한 일이 있다. 2년 후 벌어진 제1차 걸프전쟁 당시 다국적군으로 참전한 미국과 영국의 전투부대가
스텔스기, 아파치 헬리콥터, 토마호크 순항미사일, 패트리어트 요격미사일 등 압도적인 전력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라크를 무시하지 못했던 배경이다. 이때 다국적군이 사용한 해법이
있다. 바로 해독제를 미리 복용하는 전략이었다.
당시 이라크가 보유했던 화학무기의 성분에는 흡입 시에 호흡계를 멈추고 심장과 같은 핵심 장기에 치명적 손상을 입혀 죽음에 이르게 하는 독극물이었다. 그런데 이 물질은
자율신경계의 신경세포와 결합해서 신체에 영향을 준다. 다국적군의 해독제는 화학물질이 신경세포와 약하게 결합하는 물질이었다. 그러므로 성분이 체내 흡수되기 직전에 미리
해독제를 복용한다면 화학물질이 신경세포와 결합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본격적으로 독성을 띠려면 화학물질이 신경세포에 강하게 결합해야 하는데 해독제의 성분이 미리 세포에 약하게 결합해 있기 때문이다. 쉽게 설명하자면, 화학무기가 고급 외제차,
해독제는 경차다. 주차 칸에 이미 경차가 주차해 있으면 제 아무리 좋은 외제차라도 그 칸에는 주차를 할 수 없다. 아무리 경차라고 해도 차는 차다. 원래 이 해독제의 용법은
적군이 화학무기를 사용한다고 판단할 때 미리 복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경험이 없던 다국적군의 장교들은 이 해독제를 꾸준히 복용하게끔 했다. 그리고 열심히 해독제를 먹은
다국적군은 정작 해독제에 중독되고 말았다. 약은 때론 독이다. 해독제는 말할 것도 없다. 자율신경계를 조금이라도 자극하는 물질이므로 복용 용량이 적다고 해도, 결국 독이 될
수 있다. 참고로 이라크군은 당시 화학무기를 마지막까지 사용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후 미국과 영국의 참전용사들은 ‘걸프전 증후군’에 시달렸다. 원래 전쟁이 끝나고 외상후스트레스장애 등의 후유증을 겪는 군인들이 많기 마련이지만 걸프전쟁은
통계적으로 이 증후군을 호소하는 환자들이 많았다. 외상후스트레스장애 외에도, 두통, 피로, 위장관 장애와 같은 육체적 고통부터 우울감과 같은 정서적 고통까지 훨씬 높은
비율로 겪어야만 했다. 주요 원인은 바로 해독제의 주성분인 피리도스티그민(pyridostigmine) 중독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약을 맹신한 대가가 큰 편이었다.
어느 쪽이 될지는 몰라도 이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만약 화학무기가 쓰인다면, 이라크전에 사용된 화학무기와 유사할 가능성이 크다. 현재까지 개발된 화학무기의 독성물질이
아직 큰 틀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번에 유사한 해독제를 사용하게 된다면, 이 또한 약한 독이라는 것을 감안해 적절한 상황에 맞춰야 할 것이고,
해독제가 사용되는 일은 발생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