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군사툰

1840~1880 무기시장편

남북전쟁 무기가
조선으로 흘러오기까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그리고 운요호 사건을 거치면서 조선은 새로운 무기를 구매해야 했다. 그리고 이러한 조선의 무기 수요를 충족시켜 준 것은 가장 가까운 청과 일본이었다. 이들이 마주했던 19세기는 벨 에포크 시대였고, 동시에 총기의 개발은 그 어느 순간보다도 폭발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동안 수 세기 동안 전장에 등장했던 수석식 총기들은 뇌관식 소총으로, 활강식에서 라이플로, 전장식에서 후장식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글. 김기윤   그림. 우용곡, 초초혼, 금수, 판처

근대 동아시아 국제교역시장의 형성과 중고 무기의 도입

각종 전쟁으로 인한 무기 개발의 촉진과 산업혁명은 전장의 규모를 확대시키는 데 일조했다. 곧 막대한 물량을 소비하는 전쟁, 즉 근대 전쟁의 양상으로 나아갔다. 이러한 과정에서 빠르게 도태된 총기들을 처리해 줄 새로운 시장이 필요했다. 열강의 군대에서 도태된 장비는 기존 재래식 무기를 활용하던 국가에 여전히 필요한 것이었다. 대표적인 지역이 바로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지였다. 한 예로 나폴레옹 3세가 국민군을 해체한 이후 프랑스의 총기 60여만 정을 아프리카 상인 개인에 매각한 판매 사례와 영국군에서 도태된 31여만 정의 총기가 남아프리카 일대에 유입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들보다 훨씬 큰 중고 무기를 전 세계 시장에 공급한 사건은 미국의 남북전쟁이었다. 초기 북군과 남군은 60여만 정의 각종 화기를 보유한 채 내전에 돌입했다. 그러나 전쟁 막바지인 1864년 기준으로 남군은 107만 정의 화기를 수입했으며, 북군은 총 400만 정에 달하는 각종 화기를 자체 생산했다.

약 500만 정 이상의 총기가 1864년 전쟁 말까지 존재했던 것이었다. 내전이 종식되자 재고 총기의 대부분이 미국 정부에 처리해야 할 악성 재고로 전락했으며, 이에 따라 1865년부터 250만 정의 총기를 중고로 매각했다. 그리고 이러한 중고 무기들은 주로 청과 일본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시장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조선의 신식군대에 대한 열망, 그리고 그것을 충족한 중고 무기

청은 태평천국 운동의 영향으로, 일본은 막부와 신정부 사이에서 벌어진 보신전쟁과 그 이전부터 각 번이 자체적으로 무기를 도입하기 시작한 영향을 받으면서 다량의 중고 무기들을 구매했다. 주로 홍콩과 상하이, 일본 나가사키와 요코하마, 오사카 등지에서 미국과 영국, 프랑스제 무기들이 거래됐다.

한편, 청과 일본보다 조선의 개항은 느렸지만, 국제적인 무기 거래에 있어서는 빠르고 자연스러운 편입이 이루어졌다. 이때부터 다수의 총기가 시장에 범람하기 시작했고, 개항 이후 전반적으로 군을 개편할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한 조선에 무기 수요와 공급이 충족되었다. 시장에는 중고 무기들이 범람하기 시작했고, 특히 이웃 국가인 청과 일본에서 구축된 교역망의 역할이 커져갔다.

일본은 소총, 뇌관, 탄약류의 거래가 가장 많아

구식 화승총을 교체하기 위해 1878년 5월, 일본 요코하마의 마이니치 신문에서는 “고베에 체류하는 조선인들이 일본 상인들로부터 17,000정의 소총을 구매해 왔으며 조선 관리들도 체류 중”이라고 언급한 바 있었다. 아마도 당시 구입된 소총들은 남북전쟁의 잉여물자로 판매되었던 P1853 엔필드 소총으로 추측된다. 조선의 개항장인 제물포에서도 상당히 많은 무기 거래가 이루어졌다. 1884년 기준으로 전체 물자 수입량 중 세번째로 많이 들어온 것이 소총과 뇌관, 탄약류였다는 사실은 조선 내 개항장를 중심으로 한 거래량이 많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으로 넘어온 영국제 화포

조선은 소총과는 달리 대포를 주로 청에서 많이 구매했다. 태평천국과 염군의 난이 제압된 직후 잉여 생산된 대포들이 홍콩과 상하이를 통해 조선으로 유입됐고, 심지어 영국제 대포들도 공급됐다. 그 덕분에 현재 남아있는 유물 중에는 ‘홍이포’의 이름을 달고 있는 영국제 화포와 기원을 알 수 없는 화포들도 상당량 존재하고 있다.

다만 몇몇 특이한 대포들은 일본 나가사키를 통해 공급되었다. 일본 상인들은 내전 이후 매각된 야포들을 부산의 왜관을 통해 판매하고자 했다. 주로 전장식 암스트롱 야포 혹은 일본제 4근 산포들이 주요 상품이었다. 가장 흥미로운 점은 1879년 부산에서 2문의 M1841 코온 박격포와 헤일 로켓을 일본인에게서 구매했다는 것이었다. 헤일로켓은 콩그리브 로켓을 개량한 장비로 남북전쟁 당시 북군, 특히 해군에서 사용됐던 장비였고 내전 종결 직후 일본에 판매된 무기 중 하나였다.

일본 중고 무기시장의 주요 고객, 조선

일본은 조선을 장기적으로 자신들의 무기를 판매할 수 있는 시장으로 조성하기 위해 헤일 로켓의 경우 일부는 무료로 제공하였다. 또한 구매 이후 사용법을 알지 못했던 M1841 코온 박격포들의 경우 일본 해군이 조선군에게 사용법을 교육하는 등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렇듯 조선이라는 시장은 청과 일본에게 있어서 자국 내의 중고 장비를 판매할 수 있는 중요한 시장 중 하나였다. 물론 이는 부정적으로 볼 수도 있었지만, 개항 이후 새로운 근대식 군대를 창설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조선에 ‘잘못된 선택’은 아니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유럽이 평화를 누리며 경제문화가 급속하게 발전한 ‘벨 엘포크’ 시대라는 특성상, 새로운 무기들은 금세 도태되는 시대였다. 이 때문에 최신 장비를 비싸게 구매하기보다는 검증된 중고 무기들을 저렴하게 구매해 안정적으로 자국을 방위할 수 있는 군대를 편성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전술은 무기에 종속되고, 무기는 그것을 만든 국가의 정신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새로운 군대를 만들어야 했던 조선에게는 새로운 정신이 필요했고, 그렇기에 새롭게 싸울 수 있는 전술을 구사해야 했다. 청과 일본에서 대량으로 도입한 중고 무기들은 어쩌면 그러한 조선의 필요를 충족했을지도 모른다.

무기시장에서 조선에 판매된 무기들

M1841 코온 박격포

1879년 조선이 일본 상인으로부터 구입한 M1841 코온 박격포는 12파운드, 24파운드 버전이 존재하며 남북전쟁 기간 주로 북군에서 운용됐다. 이후 일본에서 보신전쟁 당시 사용됐고, 신정부 수립 이후 각 진대에 4문씩 배치되었지만 얼마되지 않아 도태됐다. 그 과정에서 민간 업자에게 매각돼 조선에 판매됐다.

헤일 로켓

콩그리브 로켓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낮은 명중률과 불편한 휴대성을 개선한 것이 바로 헤일 로켓이었으며, 남북 전쟁 당시 북군 해군에서 주로 운용했다. 이후 일본 해군이 중고로 구매하여 일시적으로 사용하다가 조선에 제공했다. 이 로켓은 무위소에서 철화전사통(鐵火箭肆筒)으로 명명되어 한동안 보관됐다.

P1853 엔필드 소총

영국의 엔필드 조병창에서 생산돼 1853년 영국군이 제식으로 채용한 이래로 크림전쟁, 남북전쟁, 보신전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전장에서 운용되었다. 2008~2009년 동대문 운동장 발굴조사 도중 교련병대의 주요 주둔지였던 하도감 터에서 P1853 엔필드 소총의 총검 유물이 발굴된 바 있다. 이를 통해 최초의 근대식 화기를 조선군도 상당량을 운용했으리라 추정된다.

4근 산포

프랑스에서 생산한 Canon de montagne de 4 rayè modèle 1859, 일명 페튈랑이다. 보신전쟁 당시 일본 육군은 물론, 각 번의 군대가 사용할 정도로 상당량이 구매됐다. 신미양요 이후 자국의 포병 전력 확충이 필요했던 조선은 1873년 초량왜관을 통해 일본으로부터 총 6문을 구매한 바 있었다. 그러나 당시 폭풍으로 수송선이 침몰해 전량 망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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