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군사툰

1888-1894 군사교관편

근대의 군사적 관습의 변화와 군사교관단

관습의 사전적 의미는 이전부터 되풀이되어 온 집단적 행동 양식으로, 이것이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지속되고 구성원들 사이에서 유지할 만한 가치가 있다면 이는 곧 전통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관습은 새로운 이념과 시대를 마주했을 때 변화할지 아니면 오히려 이전의 것을 지켜야 할지를 두고 충돌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글. 김기윤   그림. 우용곡, 초초혼, 금수, 판처

스스로 변화해야 함을 인식한 조선군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를 거치면서 조선은 기존의 군사적 관습에 관해 제고하기 시작했다. 기존의 군사력으로는 상대하기 어려운 적과 마주하면서 스스로 변화해야 함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의 움직임은 변화하는 세계의 파도에 대응하기에는 여전히 역부족이었다. 운요호 사건과 이로 말미암은 강화도 조약을 마주하고 나서야 급진적인 변화가 이루어졌으나, 이는 또다시 난관에 봉착한다.

조선과 연관된, 전통적인 제국과 근대의 제국을 꿈꾸는 국가들이 파워게임을 시도하면서 군대의 근대화는 쉽게 방향성을 잃어갔다. 결국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등을 거치면서 국가의 군대가 반란으로 사라지거나 혹은 한 정치세력의 사병화가 되어 소모되어 가는 혼란의 시대를 겪어야만 했다. 수많은 시도와 착오 끝에 조선은 근대의 새로운 군사적 관습과 전술 등을 배우기 위하여 미국으로부터 교관단 4명을 지원받았다. 이들은 1888년부터 연무공원에서 다양한 것들을 가르치며 아주 사소한 관습부터 점점 변화하는 군사적인 모습들을 구체적으로 조선군에게 인식시키기 시작했다.

제식훈련부터 자리 잡은 관습

가장 먼저 자리 잡은 관습은 제식훈련을 비롯한 서양식 도수체조의 도입이었다. 언뜻 보기에는 큰 변화가 아닌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나폴레옹 전쟁과 크림전쟁, 그리고 남북전쟁 등을 거치면서 기존의 빽빽한 전열보병 형식의 전투대형을 지나 비교적 느슨한 형태의 전열을 유지하는 산병전 형태의 전투 대형으로 발전하고 있었던 때였다.

전장식 화기가 사장되고, 장전과 사격이 빠른 후장식 화기 및 정교한 야포와 보병을 대규모로 살상할 수 있는 유산탄 등의 개발, 그리고 기관총의 대두는 전열보병의 형태보다도 훨씬 구사하기 어려운 산병전 형태의 전장으로의 전환을 이끌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산병전 형태의 전열을 구사하기 위해서는 장교와 부사관 그리고 병사가 이전보다도 더 많은 훈련을 해야 하는 것과 연결됐다.

한 예시로, 프로이센의 국왕 프리드리히 2세는 그의 저서인 《전쟁의 일반원칙(Principes generaux de la guerre)》에서 야간 행군, 숲을 따라 이루어지는 행군, 숲속에서의 야영, 순찰대의 파견, 추격전 등 산병 작전을 매우 엄격하게 금지하도록 했을 정도였다. 이는 병사들이 쉽게 흩어져서 지휘관들의 통제에서 벗어나게 되며, 종래에는 패배의 한 원인이 될 수 있다고까지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만큼 가장 기초적인 훈련에서부터 새로운 관습이 자리를 잡아야 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지휘관과 지휘자의 명령에 따라 그것을 이행할 수 있는, 단순하면서도 명료한 명령어와 행동양식 모두가 연무공원의 미 군사교관단에 의해서 제식훈련 및 도수 체조로 교육되었다. 이러한 훈련을 통해, 제물포에 방문한 미 해군의 조지 벨크냅 제독에 의해 좋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로 파생된 관습도 하나 있었다. 바로 전문적인 NCO, 즉 부사관단의 탄생이었다. 장교와 사병 사이의 간극을 메워주는 것이 바로 노련한 부사관들의 역할이었고, 이는 근대의 군대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근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군 내에서 그러한 역할은 굉장히 생소했는데, 기존의 군사적 관습에 있어서 고참병사들이 부사관의 역할을 대신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임시적인 방식으로는 미 군사교관단이 원하는 대로의 전투력을 낼 수 없었기에, 다이 준장의 지시에 따라 155명의 부사관단이 새롭게 선발되었으며, 이는 이후 대한제국 군대로까지 넘어가 장교와 병사 사이의 간극을 메꿔주는 역할을 맡는 데 큰 도움을 줄 수 있었다.

조선은 기존의 군사적 관습에 관해 제고하기 시작했다.
기존의 군사력으로는 상대하기 어려운 적과 마주하면서
스스로 변화해야 함을 인지하게 된 것이다.

군인의 두발 규정, 조선시대부터

이후 관습의 변화는 조금 사소한 내용의 관습 도입도 함께 이루어졌다.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군인들의 두발 규정과 관련된 것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단체생활 및 야외 훈련이 많은 군인들의 특성상 전염병의 위험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이루어진 조치였다.

지저분한 환경에서는 수인성 전염병은 물론, 이나 벼룩과 같은 해충이 병을 옮기기도 했으며, 심각할 경우 머리카락의 오염으로 인해 상처가 덧나는 경우도 종종 발생했다. 아직 군사적 의료지식이 미흡한 조선의 경우 이러한 지점이 모호했다. 하지만, 미 군사교관단이 부임한 직후 두발 정리에 대한 규정도 새롭게 자리를 잡으면서 현대적 의미의 위생 관념도 하나의 관습처럼 자리를 잡았다고 할 수 있었다. 물론 모든 근대적 군사 관습이 조선군에게 성공적으로 이식된 것은 아니었다.

관습과 규정 사이의 난관

가장 흥미로운 ‘관습 정착의 실패’ 사례가 있다면, 초소 근무에 대한 내용이었다. 조선군은 통상 초소에서 근무할 때, 건물 내에 들어간다고 인식하여 군화를 벗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이는 군사교관단이 바라봤을 때, 굉장히 비효율적인 일이었다. 초소 경계 근무 간 비상 상황이 발생했을 시 즉각적인 대처가 불가능하다고 보았고, 이 때문에 수차례 시정명령을 내리거나 직접 순찰을 하면서 지적했지만, 조선군 장교단 및 병사들에게까지 뿌리 깊게 박힌 인식을 고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이러한 관습을 고치기 위해 교관단은 초소의 마룻바닥을 드러내고, 돌바닥으로 이를 교체하는 강수를 두기도 했지만 오히려 조선군 병사들이 춥다는 이유로 초소 내에 화로를 가져와 맨발로 근무하는 바람에 실패하기도 한 사례였다. 비슷한 사례로 위에서 언급한 두발 규정의 도입 역시 난관을 겪었다. 군사교관단이 직접 배치되었던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의 조선군은 두발 규정이 비교적 엄격하게 유지되었지만, 지방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근대, 군사적 관습의 변화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현대의 군대에서도 통용되는 두발 관리, 그리고 도수체조와 제식훈련이 어떠한 방식으로 우리의 선조들에게 도입되었는지, 그리고 이러한 도입의 의의가 어떠한 점이 있었는지를 차근차근 따라 올라가 본다면, 그 시기의 나라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그들의 노력과 군사교관단의 세심한 교육이 엿보이는 것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K-군사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