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아람

VOL 104

NOVEMBER · DECEMBER 2020
홈 아이콘 Add Culture 고마운 선조의 유산

잊고 있던 매사냥의 DNA

대전무형문화재 제8호 박용순 응사(鷹師)

왼쪽 팔뚝에 큼지막한 매가 앉았다. 오른손으로 가야할 방향을 짚으며 외쳤다.
“매 나간다!” 순간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그의 팔에 앉은 매가 커다란 날개를 펼치고 날아올랐다.

고마운 선조의 유산01

자존심 강한 매 길들이기

매는 그 자체로 존재감이 강하다. 보고만 있어도 느껴지는 당당함. 윤기가 흐르는 깃털이며 유선형의 몸체, 강인함을 보여주는 발톱까지. 바라볼수록 빠져드는 매력이 있다. 야생의 본능이 살아있음을 온몸으로 보여준다. 저 거친 맹금류를 길들여 사냥을 한다는 게 과연 가능한 걸까. 대전무형문화재 제8호 박용순 응사는 매를 두고 “자연의 보물”이라고 표현했다. 그의 말을 그대로 옮기자면 매는 이런 존재다.

“자존심이 강해서 강제로 길들인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녀석이에요. 자기 성질대로 안 되면 날아가거나 죽어버려요. 목재를 쓸 때 결대로 도끼질을 하면 단번에 쫙 쪼개지지만 반대로 하면 좀처럼 쪼개지지 않잖아요. 매를 길들이는 것도 똑같아요. 순리대로 풀리도록 시간을 두고 부단히 훈련을 해야 해요.”
매사냥은 무조건 매가 사람을 따라줘야만 한다. 그때까지 어르고 달래면서 마음을 전하는 수밖에 없다. 어느 순간 매가 마음을 열었을 때, 서로가 무엇을 원하는지 감지하는 때가 온다. 그때 비로소 사냥이 가능해진다. 그 짜릿한 전율을 경험하고 나면 쉽사리 잊기 힘들다. 그 순간을 맞이할 때까지 매를 길들이는 과정을 두고 박 응사는 “남녀가 연애하는 것과 똑같다.”라며 껄껄 웃는다.

박 응사는 “우리는 고조선부터 매사냥을 즐기던 민족”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학자들의 연구를 보면 매사냥의 기원은 기원전 4,0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국가인 아시리아의 부조에 매사냥의 모습이 남아 있다. 기록상으로는 상당히 오랜 역사를 가진 문화인 셈. 이 풍습은 중앙아시아나 아시아 동북부에서 발원해 세계 전역으로 뻗어 나갔을 것으로 추정한다. 한반도를 둘러싼 인근 지역의 역사에서는 숙신족의 역사에서 매사냥의 흔적이 남았다. 숙신족은 기원전 6~5세기 산둥 및 만주 동북부 지역에 살았던 민족이다. 이들이 훗날 여진족과 만주족으로 이어진다. 그 옛날 숙신족이 신매와 여우가죽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이 매사냥이 성행했음을 보여주는 첫 단서다. 이런 문화는 고조선을 거쳐 한반도에도 뿌리 깊이 자리 잡았다. 삼국시대에도 매사냥을 즐기는 모습이 여러 사기에 남았다.

“어느 순간 매가 마음을 열었을 때, 서로가 무엇을 원하는지 감지하는 때가 온다.
그때 비로소 사냥이 가능해진다.”

고마운 선조의 유산02 예민한 맹금류이기에 길들이기 위해 무수한 인내와 노력이 필요한 매사냥

왕부터 서민까지 누리던 즐거움

조선도 매사냥을 즐기기는 매한가지였다. 조선 초에는 주로 권력을 가진 실세들의 문화였다. 놀이문화가 많지 않았던 그때 매사냥은 차원이 다른 놀이였다. 너른 공간을 헤짚고 다니며 스릴을 즐기는, 말 그대로 있는 자들의 유흥이었다. 먹거리까지 얻어 올 수 있으니 이만한 스포츠가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무인이었던 태조 이성계와 그의 아들 이방원이 매사냥을 수시로 즐겼다고 적고 있다. 심지어 세종조차도 매사냥을 즐겼다고 전한다. 외침이 없었던 영·정조 대는 태평성대였다. 이때는 왕과 지체 높은 이들뿐 아니라 서민까지 매사냥을 했다. 얼마나 매사냥이 보편화됐는지는 이를 그린 풍속도를 보면 알 수 있다. 한마디로 왕부터 서민까지 누구나 즐기던 문화가 매사냥이었던 것이다.

매사냥이 어느 정도로 흔했는지는 1930년대 조선총독부의 자료에 여실히 드러난다. 당시 전국적인 통계조사에 따른 자료에는 전문적인 매꾼만 1,740명에 달한다. 인구 대비로 보자면 굉장한 숫자다. 그때만 해도 엽총이 귀했고 노력만 하면 누구나 매로 사냥을 할 수 있었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매사냥을 1종으로, 엽총을 이용한 사냥을 2종으로 지정했을 만큼 대세는 매를 이용한 사냥이었다.
그러던 매사냥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지나면서 급격하게 쇠퇴한다. 전쟁 후 재건을 하면서 산업화에 몰두했고, 매사냥을 이어갈 환경이 사라져 버렸다. 매로 갈수록 귀해졌다. 불과 30~40년 만에 매사냥은 빠르게 소멸했다. 1998년, 박용순 응사가 매사냥의 대를 이어받을 수 있었던 게 신기할 정도였다. 그는 전북에서 매사냥의 마지막 맥을 잇고 있던 정영태 어른에게 매사냥을 사사받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매사냥은 불법이었다.

박용순 응사가 매사냥을 배우게 된 건 정해진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초등학교 5학년 당시 땅에 떨어진 새끼 매를 주워 키우면서 매와 첫 인연을 맺었다. 우연한 일이었지만, 그 뒤로 매에 푹 빠진 그는 직장에 매를 데리고 출근할 만큼 일상의 모든 것을 매와 함께 했다. “매를 길들이려면 하루종일 같이 있어야 해요. 조금만 관심이 소홀해지면 매는 금세 야생성을 회복해서 사람의 손을 떠나려고 하거든요. 정말 수시로 돌보고 관심을 쏟아야 해요. 그러려면 매를 보통 좋아해서는 힘들어요. 그런 말이 있어요. 응사는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태어나는 것이다. 일시적으로 좋아할 수는 있지만 이걸 업으로 삼는 건 보통의 인연으로는 힘들어요.”

“응사는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태어나는 것이다.
일시적으로 좋아할 수는 있지만 이걸 업으로 삼는 건 보통의 인연으로는 힘들다.”

우리말에 남은 매사냥의 기억

이제 매사냥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 됐다. 세계에서도 11개국에만 매사냥의 전통이 남아 있는데, 유럽과 중동의 국가가 여기에 포함돼 있다. 동북아시아에서는 몽골과 한국이 들어가 있는데, 몽골에서도 매로 사냥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매를 키우는 이도 사진이나 방송의 모델을 해 주는 걸 주업으로 삼는다. 아랍 국가에서나 왕족이 즐기는 로열 스포츠로 남아 그 명맥이 이어진다. 매사냥은 세계적으로도 사라지는 추세다.

매사냥의 성공 확률은 매우 낮다. 30퍼센트 정도. 그것도 모든 것이 잘 짜여진 상태에서 계산된 수치다. 정말 모든 것이 예측불가인 야생에서는 15퍼센트로 확률이 더 떨어진다. 그러니 총과 경쟁하자면 비교가 안 될 만큼 비효율적이다. 매사냥은 말 그대로 자연과 자연의 싸움이고 그 안에서 사냥에 성공했을 때 기쁨은 배가된다. 그의 팔뚝에 앉은 매를 한참 바라보며 “눈빛이 정말 부리부리하다.”라고 생각하던 찰나, 그가 묻는다. “정말 매섭죠?” 순간 머릿속에 전구가 확 켜지는 것 같았다. 우리말에 매사냥과 관련한 단어가 많이 남아 있다는 걸 깨닫게 됐다. 옹골차다, 매몰차다, 벼락치기 등등. 박용순 응사가 정리해 둔 용어집을 보고 있자니 매사냥이 우리 민족의 일상에 얼마나 깊이 스며 있었는지가 보인다.

매사냥이 거의 사라진 지금, 그는 매사냥을 둘러싼 여러 활동도 매사냥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있다. 매사냥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는 사람은 기껏해야 10여 명. 하지만 매사냥의 도구를 연구하거나 매사냥과 관련한 노래를 연구하는 사람 등 이 문화와 관련한 연구자는 훨씬 늘어날 수 있는 여지가 많다. 그런 이가 늘어나는 것도 매사냥 문화가 보존되는 중요한 요소라고 그는 강조했다.

“매사냥으로는 수입이라고 할 만한 게 거의 없어요. 되려 매 다섯 마리를 키우느라 들어가는 돈만 어마어하하게 많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바라는 건 딱 하나예요. 매사냥이 소멸되는 시대를 살고 있지만, 우리가 수천 년을 즐겼던 이 문화의 맥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것. 그것 하나만을 보고 살아요. 그게 내가 존재하는 이유예요.” 매의 꽁지에 길게 달린 시치미를 어루만지며 그는 말했다. ‘시치미 뚝 뗀다’고 하던 그 시치미다. 하얀 깃 위에 소뿔을 달아 만든 장신구에 ‘박용순’이라는 세 글자가 선명했다. 매사냥은 아직 이렇게 우리 곁에 살아있다.

고마운 선조의 유산04 박용순 응사가 직접 만든 매사냥 도구

고마운 선조의 유산05 매 꽁지에 붙이는 시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