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member 70
뉴욕 타임스퀘어에 6·25전쟁 참전용사 10대 영웅의 영상이 송출됐다. 한미동맹 70주년을 맞아
한미연합군사령부와 공동으로 한미 참전용사 10대 영웅을 선정해 의미를 되새기기 위한 것이었다.
<청아람>에서도 참전용사의 헌신을 기억하고 한미동맹이라는 연대를 이어 나가는 의미를 전하기 위해
참전자 수가 많은 3개국 그리고 참전자 수 대비 국가보훈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된
미국, 영국, 캐나다, 콜롬비아 ‘참전영웅’을 소개한다.
정전협정·한미동맹 70주년을 맞아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수호에 함께한 국가와 목숨을 바친 참전 용사의 희생과 헌신을 연재한다.
자료참조. 국가보훈처 이달의 6·25 전쟁영웅
6·25전쟁에 제일 먼저, 가장 많은 파병을 한 나라는 미국으로 파병자 수가 179만 명에 이른다. 그 뒤를 이어 영국, 캐나다가 뒤를 잇는다. 70년을 이어온 한미 동맹의
역사에 큰 역할을 한 인물로 가장 먼저 더글라스 맥아더 UN군 총사령관이 꼽힌다.
더글러스 맥아더 UN군 총사령관은 6·25전쟁에서 아군 지휘는 물론, 1950년 9월 15일 조수 간만의 차 등으로 작전 수행의 어려움과 미국의 반대에도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해 성공을 거뒀다.
인천상륙작전에서 공을 세운 또 한 명의 영웅은 에드워드 알몬드 육군 중장이다. 인천·원산상륙작전에서 상륙군을 지휘, 10만 명의 피난민을 이남으로 이송하는 인도주의 작전을
펼쳤고, 이에 성공해 UN군의 재반격 작전에 참여할 수 있었다.
올리버 프린스 스미스 미국 해병대 대장 또한 인천상륙작전부터 장진호 전투까지 사단을 이끈 인물. 압도적으로 우세한 중공군 반격에 퇴로 차단 위기에 처하자 1만여 병력과
피난민, 전투 장비 철수에서 포위망을 뚫고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에드워드 포니 미국 해병대 대령도 인천상륙작전을 계획하고 흥남철수 작전에서 10만 명에 이르는
피난민을 구출하는 데 공헌한 인물이다.
메러디스 빅토리호 레너드 라루 선장은 군수물자 수송을 위해 흥남부두로 향했으나 피난민을 더 태우기 위해 군수물자를 버리고 1만 4천 명을 실었다. 항해 중 태어난 5명을
포함한 승선자 전원을 경남 거제에 도착하도록 이끌었고,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가장 많은 인원을 구조한 배로 기네스 북에 오르게 됐다.
여기에 대를 이어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지킨 전쟁영웅도 있다. 아버지인 밴 플리트 장군은 미8군 사령관으로 참전해 “승산이 없는 전쟁이니 동경으로 철수해야 한다”는 참모의
건의에도 굴하지 않고 전선을 지킨 명장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의 아들 제임스 밴 플리트 2세는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해 1952년 4월 임무 수행 중 적의 대공포 공격을 받고 실종됐다. 그를 찾기 위한 적진에서 수색을 아버지 밴
플리트 장군이 ‘아군의 인명 손실’을 우려하며 중단시켰고, 청년 밴 플리트는 실종 전사자로 남게 됐다.
윌리엄 쇼 부자 또한 2대에 걸쳐 헌신하며, 아버지인 윌리엄 쇼는 선교사로 주한 미군 군목으로 자원입대해 한국 군대에 군목제도를 도입했다. 그의 아들 윌리엄 해밀턴 쇼는
하버드에서 박사과정 수학 중 6·25전쟁 발발 소식을 듣고 미 해군에 재입대해 참전했다. 인천상륙작전 때 정보장교로 작전 성공에 기여했으며 서울수복작전을 위한 정찰 임무
수행 중 적의 총탄을 맞고 28세의 나이에 전사했다.
로버트 리 티몬스 미국 육군 대위는 하와이 주둔 부대로는 처음 한국에 파병되어 격전지인 서북산 전투에서 전사했다. 이후 그의 아들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미 육군 대위로 한국
근무를 자원, 대를 걸쳐 한국 방위를 담당했다.
딘 헤스 미국 공군 대령은 1950년 7월 대구기지에 도착한 이후 한국 공군 전투기 조종사 양성 훈련을 포함해 1년여 동안 250회에 걸쳐 전투 출격을 하는 등 ‘한국
공군의 대부’로서 역할을 했다.
랄프 퍼켓 주니어 육군 대령은 1950년 11월 청천강 북쪽의 전략적 요충지인 205고지 점령 때 수류탄에 맞고도 작전을 지휘하는 등 중공군에 맞서 활약했다.
영국의 참전용사 더글러스 드라이스데일 영국 해병대 대령과 윌리엄 스피크먼 영국 육군 병장, 케네스 뮤어 소령 그리고 캐나다의 제임스 R.스톤 육군 중령과 콜롬비아의 알베르토
루이즈 노보아 육군 중령은 위기에 처한 사단의 철수 작전을 완수한 이들로 꼽힌다. 윌리엄 스피크먼의 경우에는 부상으로 영국으로 후송됐으나 3개월 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그해 8월까지 전장을 누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