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군사툰

1888~1894 조선의 미국 군사교관단

근대 조선군의 시초와 미국 군사교관단

근대적인 조선군의 뿌리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것은 1888년부터 1894년까지 조선에서 근무했던 미국 군사교관단이었다. 초기 한국군에 큰 영향을 준 것이 미군이듯이, 군사교관단이 파견된 이유는 갑신정변 이후 청일 양국 간에 맺어진 톈진조약에 의거한 덕분이었다.

글. 김기윤   그림. 우용곡, 초초혼, 금수, 판처

미국 도움으로 군사력을 정비하고자 했던 배경

개항 이후 지속해서 주변국가들의 군사적 영향에 놓여있던 조선은 톈진조약 이후 진공상태에 놓이게 됐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거치면서 조선에 이웃한 국가들은 서로를 견제하기 위해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조선에 직접적인 군 병력 주둔을 폐기했고, 다만 공사관 경비병력 및 개항장에 소규모 함선을 파견하는 정도로 물러선 상태였다. 이러한 군사적 압박이 서서히 줄어듦에 따라 조선은 스스로 자국의 군대를 어떠한 방향으로 발전시킬 것인가에 대한 선택을 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이 선택의 방향은 당시 조선의 국왕이었던 고종에 의해 이미 낙점되어 있었다. 그는 조선에 직접적인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으면서도, 우호적이라고 생각하던 미국 군사교관단을 고용하길 기대하고 있었다.

비록 1871년 신미양요를 거치면서 양국은 짧지만 격렬한 군사적 충돌을 벌이기도 했으나, 1883년부터 조선은 주변국의 압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다양한 외교적 방법을 취하면서 대미외교가 하나의 방법으로 등장했다. 이에 따라 1883년부터 고종은 미국 군사교관단 파견을 비밀리에 요청하기 시작했다. 이뿐만이 아니라 미국의 무역중개회사를 통하여 레밍턴 롤링블럭 소총 4,000정 및 탄약류를 구매하기로 계약하면서 본격적으로 조선은 미국의 도움을 받아 자국의 군사력을 정비하겠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조선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미국

조선의 대미 창구는 당시 주조선 푸트 미국 공사를 통해 주로 이어지고 있었다. 푸트 공사 역시 고종의 요청에 따라 조선군에 도입된 군사장비들에 대한 교육을 제공하거나, 혹은 주요 요새 시설들에 대한 평가 등을 보고하면서 적지 않은 도움을 주고자 개인적으로도 노력하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조선 정부 그리고 현지에 파견된 주조선 미국 공사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본토의 미 정부는 극동, 특히 조선에 대한 관심이 현저하게 떨어져있었다. 게다가 군사교관단 요청은 수 년간 국무부에서 제대로 된 답변을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조선 정부의 공식요청이 미 국무부에 보고된 이후, 해당 서류가 몇 년간 사라진 상태가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로 미국에게 있어 조선이 극동에서 가지는 입지는 매우 미미한 상태였고, 군사교관단 파견 역시 제대로 정부 간의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못할 정도로 관심을 받지 못하는 상태가 이어지다가 1888년부터 급변했다. 포크 공사가 딘스모어 공사로 교체되었고, 이 시기에 미국 대통령 역시 클리블랜드가 당선되면서 극동 외교 전반에 대한 변화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조선에 대한 관심이 없던 이전의 미국 대통령들과는 다르게, 클리블랜드 대통령은 적극적으로 조선으로의 군사교관단 파견에 앞장섰다.

남북전쟁을 경험한 미군의 조선 파견

양국은 여러 차례 접촉을 거친 뒤, 전쟁 경험이 있는 미 육군 및 해군 퇴역 장교 혹은 갓 사관학교에서 졸업한 후 임관하지 않은 인원들을 고용하는 방안을 조선 정부에 제안했다. 그리고 이를 조선 정부가 승인하면서 1888년 4월, 교관단 인선이 확정되어 조선에 파견될 수 있었다.

우선 조선에 파견된 미국 군사교관단은 상당히 좋은 경력을 갖추고 있었다. 미국 국방부는 조선에 파견할 군사교관단 구성을 1873년 이집트에 파견한 선례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이 당시 이집트군을 위해 미국 국방부는 전직 육군 장교들을 파견한 바가 있었다.

당시 미국 육군총장인 필립 셰리든은 남북전쟁과 에티오피아 원정 경험을 가진, 파견 당시인 1888년에 60세였던 윌리엄 매킨타이어 다이 준장을 조선에 파견할 군사교관단의 대표로 임명했다.

그는 1831년 생으로 1853년 미국 육군사관학교인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했으며, 남북전쟁 발발 당시 텍사스에 주둔하고 있었다. 텍사스의 연방군이 남군에 항복하자 그는 쿠바를 경유해 북군에 합류했으며, 1862년 아이오와 제20의용군 연대의 대령으로 남북전쟁 기간동안 활약했고, 1870년에 전역한 뒤 경제적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이집트로 파견됐다.

1873년, 에티오피아 원정 당시 부상을 입고 귀국하기 전인 1878년까지 약 5년 간 이집트군 참모차장으로 복무한 경력은 조선군을 훈련시키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이집트와 마찬가지로 조선 역시 근대적인 군대를 만들어야하는 입장에서, 다이 준장의 경험은 상당히 큰 역할을 한 것이었다.

조선군의 중추가 될 부사관단 양성

연무공원에서 다이의 첫 계획은 조선군의 중추가 될 부사관단의 양성이었다. 그는 국왕이 더 신뢰할 수 있는 군대로 만들고, 정예군으로 양성할 수 있도록 조선 정부에 부사관의 양성을 조언하였다. 이는 1887년 고종에게 조언했던 샤를 롱 서기관의 이야기와 일치했다. 조선군에게는 포병대에 대한 투자가 어려우니 육군의 기간 병력인 보병을 정예화라는 조언이 있었으며, 다이 준장 역시 이를 주장한 것이었다. 조선 정부는 당초 계획을 변경하였다. 조선군은 40명의 사관생도를 미리 준비시켜 장교 양성을 가장 먼저 시도하고자 했으나 다이 준장은 궁극적으로 군대의 허리인 부사관단의 양성이 더욱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160명의 후보생이 추가로 선발됐고, 여기에는 신규 모집된 인원과 사병으로 복무 중이던 인원이 혼재되어 있었다.

사관 및 부사관 후보생 자원에 대한 기대 자체는 굉장히 컸다. 건강한 육체와 의욕적인 태도는 미국 군사교관단으로 하여금 정예군 양성에 큰 희망을 안겨주었다.

1888년 5월부터 1889년 10월까지 미 군사교관단은 160명의 부사관단 후보생 중 155명을 최종적으로 훈련을 시켰다. 훈련 방식 역시 굉장히 흥미로웠다. 다이 준장은 조선군 내에서의 체벌을 줄이고, 결속력을 강화시키는 방법으로 훈련을 강화했다.

주로 훈련은 근접 전투 훈련 및 소규모 분대 단위 기동훈련 위주로 진행됐으며, 명령은 주로 영어로 이뤄졌다. 조선군이 영어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것을 감안해 짧고 간결한 영어 명령어를 교육하도록 했다. 동시에 보병 전술도 산병전 위주로 개편하기 시작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조선군은 유럽 스타일의 전열보병식 전술을 구사하고 있었다. 교련병대의 창설부터 서양식 신식군대의 기본이 바로 전열보병에서 기인했기 때문이었다.

부사관단의 훈련과 함께 수도에 주둔한 조선군은 사격실력부터 개선해야했다. 부임 초기 미국 군사교관단은 조선군의 사격술 훈련을 진행했으나 평균 40% 가량의 명중률만을 보여 굉장히 큰 실망을 했었다. 공언한대로 정예보병대를 양성하고, 그들이 산병전을 구사하기 위해서는 이보다 훨씬 나은 사격술을 구사해야했기에 전반적으로 사격훈련량이 크게 증가했다. 이외에도 개틀링 포대 및 크루프 야포를 포함한 포병대의 재교육과 보병-포병-기병의 합동 훈련은 물론, 조선 방어계획 수립, 심지어 조선군 장교단의 웨스트포인트 미국 육군사관학교 및 아나폴리스 미국 해군사관학교 유학 지원까지 굉장히 다양한 분야에서 조선 정부를 위해 헌신했다. 그러나 이들의 앞길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고질적인 문제는 조선 정부의 급여 체불 문제와 조선군 내의 반발, 그리고 함께 고용된 미국 군사교관단 인원들의 일탈은 다이 준장의 계획을 크게 방해하고 있었다. 임금 체불 문제는 조선 정부와 군사교관단 사이의 주된 불화이기도 했다. 조선 정부는 해관세를 활용해 이들에게 급여를 지급하기로 했으나 자주 체불되었고, 전체 복무 기간 동안 여러 차례 같은 문제가 반복됐다.

그런데도 이들이 조선에 준 영향은 상당한 편이었다. 지속적으로 군대의 근대화를 꾀해왔던 조선 정부는 이들을 통하여 군사적 개혁을 이룩할 수 있었으며, 더 나아가 주변국의 압력으로부터 자주적인 국방력 강화 및 주권 보호를 위해 노력했던 면모도 갖추는 데 도움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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