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게 더 멀리
직장인들끼리 점심을 먹으러 나가는 장면을 생각해 보자. 부장이 말을 꺼낸다. “뭔가 참신한 메뉴를 좀 먹어볼까? 참신한 생각 많은 이 대리는 뭐 먹고 싶어?” 이때, 이 대리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정말로 지금 먹고 싶은 참신한 메뉴를 대답한다면 어떻게 될까? “탕후루 먹으러 가면 어떨까요? 두 개 정도 먹으면 간단하게 점심 식사 때울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렇게 대답한다면 아마도 대부분은 “무슨 탕후루를 어떻게 식사로 먹어? 그거 말고 뭔가 좀 색다른 좋은 생각 없어?”라는 대답이 돌아올 것이다.
글. 곽재식_과학자이자 작가
예외가 없지는 않겠지만, 대체로 부장 정도 되는 사람이 점심 메뉴를 대리에게 제안해 보라고 하는 것은 정말로 대리의 참신한 생각을 받아들이고 싶어 하기 때문은 아니다. 자기가 먹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있을 텐데, 생각하기가 귀찮으니까 대리에게 이것저것 추천해 달라는 목적일 때가 많다.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직장에서 “네 생각대로 하라”라는 말은 종종 그 말 자체와 의미가 다른 뜻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너 점심 뭐 먹고 싶냐?”라는 말은 오히려 “내가 먹으면 좋을 것 같은 메뉴를 네가 생각해서 제안해 보라”라는 뜻에 가깝다. “이 대리는 이번 야유회 어디에 가고 싶나?” 이런 질문 역시 “내가 어디로
야유회를 가면 좋다고 생각할 지 이 대리가 한 번 잘 생각해서 알려줘 봐라”라는 뜻일 가능성이 높다. 다시 말해, 직장에서 상사가 말하는 “네 생각대로 하라”는 말은 종종 “상사가 너의 생각이 어떨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 텐데, 그 생각을 읽어서 그대로 하라”라는 뜻이다. 결국 이 대리의 제안을 듣고 자기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는 쪽으로 결론을 내린다. 그러면서도 “오늘은 이 대리의 생각대로 메뉴를 고르게 해 주었군”이라고 생각하며, 무엇인가 자신이 대리의 뜻을 존중해 주었다는 느낌까지 가져가고 싶어 할 때도 있다.
다같이 점심을 먹거나, 야유회 장소를 고르는 일은 어차피 여러 사람이 함께 하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 발자국 떨어져서 보면, 그에 대한 의견을 제시할 때,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 지, 모든 사람들에게 어떻게 느껴질 지를 생각해서 답을 말하는 것은, 뭐 그럴 수도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면서 굳이 “네가
좋아하는 게 뭐냐?”고 물어본다면, 말투는 좀 위선적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그러려니 할 만한 문제다. 다시 말해, 살다 보면 상상력이 필요한 듯이 던진 질문에 대해서도, 사실은 오히려 상사의 취향을 알고 있는 기억력과 눈치가 필요한 질문이 많다는 뜻이다.
세상사, 살다 보면 기억력과 눈치가 필요할 때도 많기는 하다. 그런데 정말 상상력과 창의성이 필요한 작업에서도 이런 태도가 이어지면 그때는 문제가 조금 더 심각해진다.
자유롭게 마음껏 생각을 펼쳐 보라고 해 놓고, 결국 원하는 것이 눈치를 잘 보고 분위기를 잘 맞춰 주는 것이라면, 원래 원했던 자유로운 생각은 나오지 못한다. 마음껏 생각을 해 보는 사람이 없어지고, 새로운 생각을 하려는 사람도 줄어들게 된다.
많은 경우에 간과되기 십상인 사실이지만, 상상력은 공짜가 아니다. 생각을 마음껏 펼치고, 자유롭게 생각하는 것도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남들과 다른 것, 과거에 보지 못한 것, 신기한 것, 새로운 것을 머릿속에서 떠올리는 일은 귀한 일로 수고와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애써 그렇게 해 봐야, 결국 원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눈치 보기, 너도 모르는 네 마음 맞춰 주기 정도의 일이라면 아무도 굳이 힘들여 상상을 하지 않게 된다. 이런 식이라며 정말 어려운 문제를 마주했을 때, 그 문제를 풀어내는 다양한 방향을 살펴볼 수 있는 상상력을 기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많은 곳에서 상상력을 원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을 눈치채길 바라는 일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나는 작가로 활동하면서 여러 잡지나 신문사에서 “작가님만의 독특한 상상력으로 자유롭게 글을 써 주시면 됩니다”라는 말이 들어간 원고 청탁을 종종 받는다. 그러면 나는 고민한다.
“저곳에서 나에게 진짜로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문자 그대로 내가 상상하는 이야기를 자유롭게 쓰는 것을 바라는 때는 많지 않다. “저 작가에게 부탁하면 대략 어떤 느낌을 가진 글이 오지 않을까” 정도의 생각을 어렴풋이 갖고 있으면서도, 정확히 뭘 써달라고 해야 할지 이야기를 해 주지 않을 뿐이다. 이럴 때 나에게 필요한 상상력이란, 역시 진짜 상상력이라기보다는
비슷한 매체들이 보통 어떤 글을 바라곤 했는지를 되돌아보는 기억력과 눈치 보기다. 보통은 원고를 주고받는 담당자뿐만 아니라, 그 담당자의 윗사람과 그 담당자에게 일을 발주한 발주처와 그 발주처의 윗사람의 눈치까지 생각해야 할 때가 많기에 이것도 기술이라면 기술이 필요한 일이다.
다른 영역에서도 비슷한 경우를 찾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상상력을 발휘해서 어떤 제품을 만들어 보면 좋을지 제안해 보라고 하는 공모전이라든가, 창의력을 발휘해서 신선한 작품을 만들어 보라는 대회들 중에서, 과연 상상력이나 창의력을 충분히 존중해 주는 곳들이 얼마나 있을까? 제품 공모전의 상상력이란 공모전을
심사하는 주로 중년 남성으로 이루어진 회사 높은 분들의 마음에 얼마나 드는 제안을 꾸며 내느냐의 경쟁이 되기 십상이다. 대회를 위한 창의성 역시 그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선배 예술가들의 구미를 얼마나 만족시켜 줄 수 있는지에 대한 경쟁으로 빠지는
일은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가? 학교나 각종 교육 프로그램의 창의력 교실이라는 곳이 상상력을 키우기보다는 강사가 원하는 사고방식, 사회가 창의적으로 보인다고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의 답을 찾는 기술을 키워 주는 때도 많지 않은가?
나는 요즘, 여러 회사에서 상상력을 발휘하여 새로운 사업 아이디어를 짜내 보라고 하면 결국 골프와 관련된 아이디어로 끝나는 사례가 대단히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역시 마찬가지 이유다. 그래야 그 상상력을 심사하는 회사 높은 분들이 쉽게 잘 받아 들이기 때문이다. 회사의 기술을 어린이 장난감이나 육아용품에
사용하면 굉장히 성능이 좋을 거라는 생각은 윗선을 통과하기 어렵다. 회사 중역들은 이미 자녀를 다 길러낸 나이 든 사람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집안일에 필요한 도구를 만드는 데에서 어떤 아이디어를 내는 것도 좋은 평가를 받기란 쉽지 않다. 부유한 회사의 고위층은 자기 손으로 힘들여 집안일을 하지 않는 때가 많아
별달리 가깝게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한국의 중장년층 중에는 골프에 빠져 있는 사람이 많다. 골프에 관한 제품을 만들자는 생각을 제안하면, “그것참 말 되네”, “가려운 데를 긁어 주는 생각이구먼”, “뭘 말하는 지 바로 느낌이 온다”는 평가를 줄줄이 받게 된다. 이런 예들을 한참 보고 있으면, 정말로
사람들이 자유롭게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곳은 따로 있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무엇인가를 평가하여 최고의 상상력을 뽑기 위해 애쓰는 곳에서는 막상 상상력이 잘 표현되지 못한다. 대신 최소한의 기준을 통과하기만 하면 무엇이든 자기 생각을 보여도 상관이 없는 헐렁한 곳에서 상상력은 빛나지 않나 싶다. 미술 대회보다는 낙서에서, 표어 공모전보다는 인터넷 댓글에서 더 많은 상상력을 볼 수 있다는
이야기다.
결국 상상력이 정말로 펼쳐지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그 상상력을 받아 줄 수 있는 ‘관용’이다. 내 생각과 내 기준을 조금 접어 주면서 상대방의 상상력을 받아들여 주려고 할 때, 상상력은 제대로 발휘될 수 있다. 말하자면, 어쩌면 “어떻게 저렇게 참신한 생각을 했을까”라고 마음에 쏙 드는 생각보다는 오히려
“좋은 점도 있어 보이긴 하는데 마음에 안 드는 점도 있네”라는 정도의 느낌이 드는 결과가 더 좋은 상상력을 발휘한 결과일 수 있다는 이야기다. 내 고정관념을 넘어선 상상력이기 때문에 내 마음에 안 드는 대목이 있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열린 마음으로 그 껄끄러움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상상력은 그 힘을 제대로 발휘한다. 현실의 한계를 넘어서고, 풀기 어려웠던 문제를 풀어내며, 눈치 볼 필요 없이 더 새롭고 재미있는 일을 즐길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그렇게 해서 상상력은 우리의 기대를 넘어선 곳으로 우리를 데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