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이후
처음에는 쉽지 않았다. 당연하다. 갓 해방된 나라였기 때문이다. 1946년 말에 가서야 최초의 레코드 회사라고 할 수 있는 조선레코드회사가 설립됐고, 국산 음반이 발표된 건 1947년 8월이 되어서였다. 대중음악은 아니었다. 음반 번호 1호에는 ‘애국가’가 실려 있었고, 2호에는 ‘조선의 노래’와 ‘건국의
노래’가 수록되었다. 3호 역시 비슷했다. ‘여명의 노래’와 ‘해방 기념가’다. 본격적인 대중음악이 나온 때는 대략 1948년이다. 남인수, 장세정, 이난영 등의 가수가 이 시기에 출현했다.
광복 이후 대중가요는 주로 트로트 혹은 국악풍 대중가요라 할 신민요였다. 여러 곡이 대중의 사랑을 받았지만 단조 트로트인 ‘흘러온 남매’가 단연 인기 최고였다. 이난영, 심영옥, 남인수, 노명애 등의 가수가 참여해 함께 불렀다. 제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흘러온 남매’는 이산가족의 아픔을 그린 노래다.
당시 남북으로 나뉜 비극적 상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1947년에는 유명한 ‘신라의 달밤’이 공개되어 사랑받았다. 현인이 부르고 박시춘이 작곡한 노래는 가히 한국 대중음악의 살아있는 고전이다. 이 외에 한복남의 ‘빈대떡 신사’는 해학적인 가사로 시대를 풍미했고, 1948년 현인과 박시춘은 ‘럭키
서울’이라는 곡으로 다시금 히트를 기록했다.
전쟁과 휴전 이후
광복 이후 틀을 잡기 시작한 한국 대중음악은 얼마 지나지 않아 시련을 맞이한다. 그렇다. 6·25전쟁이다. 전쟁이 마침내 끝난 이후부터 한국 대중음악은 조금씩 성장했다. 1954년 스타레코드를 필두로 유니버살레코드, 오아시스레코드 등이 문을 열었고, 1955년 초에는 킹스타레코드가 음반을 내놓으면서 시장에
안착했다. 기실 광복 이후부터 전쟁 이전까지 한국 대중음악은 레코드 중심이라기보다는 공연 중심이었다. 당연하다. 레코드플레이어를 가진 인구가 극소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레코드’를 중심으로 하는 본격적인 시장형성은 휴전 이후부터라고 봐야 한다. 이때부터 한국 대중음악 역사를 길이 빛낼 스타가 쏟아져
나왔다. 주로 미8군 쇼 무대를 통해서였다. 즉, 전쟁의 여파가 한국 대중음악의 직접적 산파 역할을 한 셈이다.
미8군 쇼와 트로트 전성시대
미8군 쇼는 1950년대 중반부터 한국 뮤지션의 주요 공연 무대로 새롭게 대두된 공간이다. 1957년 미8군 쇼만 운영하는 최초의 업체가 만들어졌고 이 업체를 통해 여러 뮤지션이 무대에 진출하는 체계가 형성되었다. 사실 미8군 쇼는 일종의 종합 엔터테인먼트 무대였다. 가수만 아니라 댄서, MC, 코미디언,
마술사 등이 무대에 올라 이름을 알렸다. 그중 음악인으로 한정해 최고 스타는 한국 록의 시조새 신중현이다. 그는 애드훠, 더 맨, 무엇보다 엽전들 같은 자신의 밴드를 통해 한국 록의 기초를 닦은 위대한 전설이다. 이른바 신중현 사단도 존재했다. 김추자, 펄 시스터스, 김정미 등의 가수가 신중현의 지휘 아래
1960년대 후반부터 대중을 사로잡았다. ‘봄비’, ‘꽃잎’, ‘미련’, ‘아름다운 강산’, ‘미인’, ‘거짓말이야’ 등 신중현이 쓴 히트곡이 거의 국민 가요급의 대접을 받았다.
트로트 역시 인기가 대단했다. 유명한 이미자의 ‘동백아가씨’가 1964년 터지면서 이후 트로트는 한국 대중의 애수를 상징하는 장르로 자리 잡았다. 트로트 전성시대를 대표하는 쌍두마차는 남진과 나훈아다. 전자가 엘비스 프레슬리풍 로큰롤로 시작해 한국 최초의 오빠부대를 몰고 다니면서 나중 트로트를 대표했다면
후자는 남성적 카리스마를 전면에 내세우는 방식을 통해 라이벌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님과 함께’와 ‘고향역’은 지금도 라디오에서 들을 수 있는 두 가수의 올 타임 리퀘스트다.
조용필과 장르 다양성, 언더그라운드 열풍
팝이 있었다. 디스코가 있었고, 트로트가 있었다. 포크와 댄스도 빼놓을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록이 있었다. 과연 그랬다. 1980년대는 한국 대중음악 역사상 최초로 꽃핀 장르 다양성의 시대였다. 여러 가수와 밴드가 등장해 다채로운 장르 팔레트를 대중에게 선사했다. 1980년대는 해방 이후 차근차근
성장한 한국 대중음악이 질적, 양적으로 전성기를 구가한 최초의 순간이었다. 그 중심을 장악한 전설을 대중은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그리고 만약 그 중심에 왕의 자리가 있다면 그 자리는 단연코 조용필의 몫이다.
물론 조용필 독재는 아니었다. 댄스 쪽에서는 박남정과 김완선, 소방차가 활약했다. 조용필과 송골매 등이 디스코 리듬을 차용한 히트곡(‘단발머리’, ‘어쩌다 마주친 그대’)으로 당대를 쥐락펴락했고, 주현미, 심수봉, 현철, 송대관 등이 트로트 진영을 대표하면서 높은 인기를 구가했다. 언더그라운드 열풍도 빼놓을
수 없다. 동물원, 어떤날, 김광석이 포크의 정서를 대중에게 심었다면 언더그라운드 록은 단 하나의 이름으로 정리할 수 있다. 그렇다. ‘그것만이 내 세상’이라고 외치며 ‘행진’했던 바로 그 밴드, 들국화다.
서태지와 아이들, 아이돌의 시작
1990년대와 1980년대는 딱 하나의 기준으로 갈린다. 바로 문민정부의 시작이다. 이런 시대사적 흐름은 대중음악과 대중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쉽게 말해 1980년대까지만 해도 대중문화는 사회적으로 약간은 낮게 취급되는 면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1990년대 들면서 대중문화에 대한 재평가가 서서히
이뤄졌다. 속칭 ‘딴따라’라고 경멸했던 시선 역시 제법 수그러들었다. 이런 과정에 우리보다 ‘나’를 더 중요시하는 엑스 세대가 출현했고, 세대 간의 골이 깊어졌다. 이때의 뉴스를 정확히 기억한다. 엑스 세대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는 논조가 다수였다. 물론 대한민국은 망하지 않았다. 이 모든 현상을 압축해서
보여준 한 그룹이 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다. 그들을 따라 수많은 댄스 가수·그룹이 등장하면서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최초로 댄스가 메인스트림을 장악하는 현상이 벌어졌다. 이후 SM 레코드가 H.O.T.를 선보이면서 아이돌 문화가 시장을 강타했다. 바야흐로 아이돌의 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아이돌 이후부터 현재까지
이제 한국 대중음악은 해외에서 K-팝으로 불린다. 기억해야 한다. K-팝이 곧 한국 대중음악은 아니다. 물론 K-팝이 일궈낸 성취는 찬란하다. 국격을 끌어올렸고, 관광산업에도 이바지했다. 모두 느꼈을 것이다. 2010년대 이전만 해도 한국을 아는 사람은 해외에 많지 않았다. 있어봤자 “North or
South?”라는 지겨운 꼬리표가 뒤에 붙었다. 그러나 이제 대부분의 사람이 대한민국을 안다. K-팝의 공헌일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싸이(Psy)의 ‘강남스타일’이 보통 K-팝 해외 진출의 본격 효시로 꼽힌다. ‘강남스타일’의 경우 빌보드 싱글 차트 2위까지 올랐는데 집계 방식이 현재와 같았다면 확실히 1위였을 것이다. ‘강남스타일’ 이전까지 빌보드는 유튜브 조회수를 포함하지 않았다. 그러나 ‘강남스타일’이 정상에 오르지 못하면서 유튜브
조회수를 넣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결국 이를 수용한 것이다. K-팝은 비주얼적 특성상 동영상 플랫폼에서 특히 강세다. 이런 측면에서 ‘강남스타일’에게 큰 빚을 졌다고 볼 수 있다. 이후 BTS가 등장했고, 블랙핑크가 주목받았다. 글을 쓰는 현재 로제(ROSE)는 브루노 마스(Bruno Mars)와의
협업을 통해 ‘APT.’를 빌보드 싱글 차트 3위까지 올렸다. BTS는 빌보드 싱글 차트 1위곡만 5개다. 20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던 일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또한 한국에는 1990년대 중반 이후 폭발한 인디 문화가 여전히 존재한다. 장기하와 얼굴들, 국카스텐, 검정치마, 혁오, 잔나비, 10센치 등이 인디에서 등장해 종내 스타의 지위에 올랐다. 그렇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결국 대중음악의 생명은 다양성에 위치한다. BTS와 블랙핑크를 위시로 한 K-팝은 위대하다.
그러나 광복 이후 펼쳐진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와 그 현재는 K-팝보다 더 깊고, 거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