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마전사의 기원

글. 강인욱(고고학자, 경희대 사학과 교수)

초원을 중심으로 아시아와 유럽을 모두 정복했던 징기스칸과 몽골의 기병, 그리고 삼국시대 이래로 우리나라를 침략하는 북방의 오랑캐 등 강력한 전사라고 하면 우리는 가장 먼저 말 위에서 화살을 쏘고 칼을 휘두르는 기마전사가 떠오른다. 말과 하나가 되어서 날쌘 기동력을 앞세워 사람들을 공포에 빠뜨리고 세계 역사를 바꾸었던 기마전사는 언제, 그리고 어떻게 탄생했을까.

안장이 바꾼 역사

기마전사의 필수품은 말이다. 그런데 말은 원래 탈것이 아니라 식용으로 인간의 역사에 약 6,000년 전에 처음 등장했다. 말은 덩치도 제법 있지만 초식 동물인지라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니 소, 양, 염소 등과 함께 적절한 식량자원이었다. 하지만 목동들의 골머리를 썩이는 것이 하나 있었으니, 말은 너무나 빨리 도망간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미생>이라는 드라마의 주제가 ‘야생마’라는 노래도 있겠는가. ‘야생마’는 자신의 예측할 수 없는 앞날을 마치 길들여지지 않은 말이 사방팔방으로 날뛰는 것처럼 비유한 것이다. 말을 키워본 사람이라면 쉽게 공감할 정도로 야생의 말은 제압하기 힘들다. 천신만고 끝에 유라시아 초원의 목동들은 손가락만한 크기의 재갈을 발명했고, 재갈을 입에 끼워서 말을 제압했다. 여기에서 기마전사가 탄생했을까? 아직 한 단계의 관문이 더 남아있다. 바로 말의 등이 문제이니, 뾰족한 등뼈로 이루어진 말에 그냥 탔다가 사고라도 나면 가장 소중한 생식기 부분이 망가지거나 목숨을 잃기에 십상이다. 운이 좋아 목숨을 건져도 오랫동안 타다 보면 결국 생식기능에는 문제가 생길 것이고 결국 대가 끊겨서 말을 키우는 사람들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마전사 대신에 약 4,000년 전에 전차(Chariot)를 먼저 발명했다. 말 등에 직접 타지 않고 말 뒤에서 말을 몰면서 화살을 쏘고 방어를 했다. 하지만 전차는 만들고 관리하기에 비싸며 평지에서만 사용이 가능하니 모든 사람이 탈 수는 없다.

‌2,200년 전 중국 윈난성에서 발견된 기마전사의 청동기

푹신한 양털 방석이 만들어 낸 기마전사

본격적인 기마전사는 3,000년 전 유라시아 초원을 제패한 스키타이계통의 사람들이 등장하면서 시작됐다. 이들이 말 등에 올라타기 위해서는 사소해 보이는 물건이 발명됐으니, 마치 지금의 방석 같은 푹신푹신한 말안장이다. 이 3,000년 전 유라시아 초원의 유목민이 양을 치고 그 털을 이용한 쿠션 같은 부드러운 안장은 비록 사소해 보이지만 위대한 역사를 만들어냈다. 사람들은 말 등에서 말과 하나가 됐고, 그들이 쏘아대는 화살은 말을 타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공포였을 것이다.

다만 처음 등장한 안장은 요즘 것과 달리 방석 같은 수준이었으니 완벽하게 충격을 흡수하지는 못했다. 그러다 보니 그리스 기록에는 전사가 고자였다는 기록도 보인다. 고대 그리스의 기록에는 스키타이의 남자 전사들을 고자라는 뜻의 ‘에나레스’라 부르고 여자들을 보고도 전혀 관심이 없다고 기록했다. 실제 스키타이인들은 공포의 대상이라 과장된 차원도 있지만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다.

스키타이인들 사이에는 결혼을 하지 않고 목숨을 걸고 함께 싸우던 친위대가 있었다. 그들 중에는 여성전사(=아마조네스)도 있었지만 서로 결혼을 안 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는 전사들이니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양육할 수 없었다. 이런 풍습이 유행한 배경에는 푹신한 안장에서 오래 말을 탔기 때문에 생식능력이 떨어졌던 것도 원인 중 하나였다.

신라시대 때의 말을 탄 토우로, 국보로 지정된 ‘도기 기마인물형 명기’
© 국가유산청, 국보_도기 기마인물형 명기

진시황의 병마용에 등장하는 기마전사

지역 간의 문화와 기술을 촉진시키는 가장 빠른 길은 아마 전쟁일 것이다. 당장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미국과 소련은 경쟁적으로 원자탄, 제트기, 핵잠수함 등을 경쟁하며 서로의 기술을 베끼면서까지 만들어냈다. 상대가 원수 같을수록 그들을 당해내는 기술이 없으면 그것으로 내 운명은 끝나는 것이니 그만큼 기술의 전파가 빠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초원의 기마전사가 중국으로 들어온 흔적은 중원의 서북쪽에 위치한 진나라에서 그 흔적이 발견된다. 중국 시안시의 병마용 유적에는 안장을 갖춘 말의 도용도 함께 발견됐다. 그런데 그 형태가 알타이산맥의 파지릭문화에서 사용하는 것과 완전히 똑같다. 당시 초원의 기마민족과 접하고 싸우면서 세력을 키우던 진나라였다. 그렇게 맷집을 키우고 기마전사를 양성했기에 중국 내에서 오랑캐로 취급받던 진나라는 다른 나라들을 무너뜨리고 통일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다.

비슷한 상황은 만리장성을 사이에 두고 흉노와 접해있던 조(趙)나라도 마찬가지였다. 한자성어 ‘호복기사(胡服騎射)’라는 뜻은 바로 오랑캐의 옷을 입고 기마를 하며 활을 쏘는 연습을 한다는 뜻이다. 글자 그대로 기마전사가 된다는 것으로, 말은 쉬워 보여도 결코 간단하지 않았으니, 기존의 관복과 기술을 모두 버리고 기마전사의 전술을 습득해야 했다. 전국시대 조나라의 무령왕은 자기 나라를 개혁하고 주변국과의 충돌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일종의 ‘충격요법’으로 기마전사의 복장을 하고 모든 문무백관이 따르도록 했다. 이 말만 보면 마치 조무령왕이 기마술을 도입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이전부터 있었던 부대였다. 다만 전면적으로 도입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조무령왕이 의도했던 것은 전면적인 군사제도의 개혁이었다. 기마전사가 말이 쉽지 사실 초원이 아닌 중국에서는 마구간이나 목초지를 따로 만들고 말을 조련할 마부들도 초원에서 스카우트해야 했다. 여기에 새로운 진법에 말 위에서 무기를 다루고 마상술도 익혀야 한다. 어디 이런 변화가 말처럼 쉬울까. 혁명적인 변화를 위해서는 누구보다 장수들이 바뀌어야 하니 조무령왕이 진두지휘를 한 것이다. 이렇듯 기마전사는 징기스칸이 등장하기 1,500년 전에 이미 중국사의 판도를 뒤흔들어 놓았다.

진시황의 병마용

기마전사가 바꾸어 놓은 음식문화

세상을 호령하는 기마인들이 등장하자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공포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그만큼 많은 이야깃거리를 남겼다. 먼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켄타우로스이다. 말의 몸통에 사람의 머리를 하고 화살을 쏘는 켄타우로스는 마치 말과 하나가 되어서 우리를 공격하는 기마전사의 모습을 신화한 것이다. 숲속에서 쏜살같이 달려 나와 공격을 하고 말과 함께 생사고락을 같이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반인반수라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또한 몽골제국의 기마전사를 보고도 서양사람들은 수많은 이야깃거리를 만들었으니 그중의 하나는 우리도 즐겨 먹는 육포이다. 중세 서양인들은 몽골의 전사들이 생고기를 안장 밑에 넣고 달리면 자연스럽게 건조되어서 육포가 되어서 식량의 보급 없이 수천 리를 달려갈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심지어는 생고기를 다져서 먹는 육회의 일종인 ‘타르타르스테이크’도 이러한 몽골기마인의 전통(타타르는 서양에서 몽골을 뜻했다)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사실 이 말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말안장을 얹은 말의 등은 이런저런 생채기가 나고 까진 상태인데 그 위에 생고기를 얹는다면 말이 견딜 리가 없다. 게다가 태양이 작열하는 몽골의 초원을 두고 굳이 말안장에 넣어둘 필요도 없다. 그만큼 기마전사들이 한 줌 육포를 물에 넣어서 한 끼 식사를 하는 것을 보면서 신비로움을 느꼈다는 뜻이다. 또한 타르타르스테이크도 고기를 굽거나 할 틈이 없이 빠르게 먹는 풍습과도 연관되어 있다. 기동성을 극대화한 기마전사에게 패스트푸드는 숙명 같은 것이었다. 어쩌면 기마전사들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수많은 패스트푸드를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뿐이 아니라 샤부샤부 같은 전골요리의 기원도 기마전사와 관련이 있다. 아무리 기마전사라고 해도 맨날 육포만 먹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복잡한 요리도구와 그릇들을 말 위에 얹을 수도 없었으니, 대신에 한 부대에 1~2개 정도의 구리솥을 가지고 다녔다. 사방을 다니다 좋은 식재료를 구하거나 잔치를 할 때는 그 구리솥에 갓 구한 식재료에 고기를 넣어서 함께 끓여 먹었다. 그렇게 따뜻한 전골요리를 끓인 솥을 두고 여럿이 나누어 먹으며 기마전사들의 사기도 함께 올라갔을 것이다.

신속함으로 무장한 21세기의 기마전사

3,000년 전 스키타이인들이 도입한 기마전사는 이후 모든 인간의 전쟁을 바꾸어놓았다. 날랜 말을 타고 멀리 날아가는 복합궁(활의 부속을 나무와 뼈 같은 다른 재질로 이어 붙인 것, 탄성이 좋아져서 더 멀리 날아감)을 사용하여서 멀리까지 화살을 날렸다. 그렇게 빠르게 달려서 습격을 하고 후퇴하는 힛트앤런 전법은 적은 수의 초원 유목민족이 유라시아를 제패하는 배경이 됐다. 중세 이후 총과 화약이 등장하고도 한참 뒤인 19세기까지도 여전히 기마전사는 큰 위력을 발휘했다.

지금은 기마전사를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빠르게 이동하여 먼 적을 공격하고 후퇴하는 기법은 지금의 자주포하고도 비슷할 것이다. 또한 거추장스러운 짐을 모두 버리고 가볍게 사방을 이동하는 삶은 디지털시대 많은 사람이 살아가는 방법이기도 하다. 지금도 당신이 삶에 지쳐서 모든 것을 버리고 배낭 하나 둘러매고 어딘가 떠날 상상을 한다면, 어쩌면 여전히 당신 속에는 기마전사의 DNA가 남아있다는 뜻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