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사의 상징이 투구인 이유
우리 신체 기관에서 제일 중요한 곳은 머리일 것이다. 생각을 하는 두뇌와 오감을 느끼는 기관이 모여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머리는 왜 생겼어요?”라는 단순하지만 중요한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손에는 눈, 발에는 코, 배에는 귀 이런 식으로 왜 발달하지 않았을까 이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척추동물은 두뇌와
눈, 귀, 코, 입이 모여 있는 이유는 컴퓨터를 떠올리면 빠르다. 배선이 짧을수록 에너지가 적게 들며 반응이 빠르고 고장이 적기 때문이다. 동물도 마찬가지인지라 모든 정보를 처리하는 두뇌와 그 주변에 감각기관이 들어와 있다.
무슨 위기 상황이 되면 본능적으로 머리를 감싸는 우리의 행위로 보면 투구는 어쩌면 인간의 본능이 만들어낸 최초의 보호구였을 것이다. 전쟁이 발달하면서 투구도 함께 발전해서 선사~청동기 사회에서 동서양 할 것 없이 가죽·목피·뼈를 덧댄 유기질 모자나 금속판을 덧댄 모자(또는 투구)가 존재했다. 돌에서 청동,
철로 인간이 가진 무기가 발달하는 것에 비례해 머리를 보호하는 투구도 함께 발전했다. 또한 인간의 머리는 그 사람의 지위와 권위를 상징하기도 하니 투구에는 그 사람의 지위를 상징하는 다양한 무늬가 들어갔고, 또 적장의 투구를 뺏는 것은 승리의 상징이었다. 서주(西周) 시기 산시성 샤우즈에서 나온 청동기에
새겨진 명문은 ‘오랑캐를 사로잡고 투구 30점을 빼앗았다’라고 적는다. 투구가 곧 전과(戰果)의 단위였다는 뜻이다.
세계적으로도 빠른 고조선의 투구
흔히 전사의 투구라면 찬란한 금속의 청동제 투구를 떠올린다. 유럽에서는 약 3,500년 전부터 청동투구가 사용된다. 동아시아에서는 약 3,500년 전인 상나라에서 등장했고, 고조선을 포함한 비파형동검문화권에서 약 3,000년 전의 것이 발견되어서 세계적으로도 아주 빠른 편이다.
발해만·요서권의 하가점상층문화는 인접한 몽골을 통해서 유라시아의 전차와 발달된 청동제 무기를 수입했다. 청동무기가 있으면 그것을 막는 투구가 나오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이 투구들은 단순한 보호구를 넘어 공동체의 기술력과 군사 조직, 그리고 외부와의 교류를 증언한다. 동시기 중원이나 스키토–시베리아권
전반을 통틀어도 이렇게 조직적으로 투구가 출토되는 예는 많지 않다. 하가점상층문화의 투구는 그래서 더 유별나다.
약 3,200년 전 주나라가 지금의 베이징 일대까지 오면서 하가점상층문화의 사람들은 주나라와 대립한다. 이 시기 베이징 창핑구 바이푸(白浮)와 등 주어루(涿鹿, 탁록)일대의 무덤에서는 중국제 청동기와 함께 여러 청동투구가 발견됐다. 당시 주나라와 중국 동북방 이민족 간의 치열한 전쟁을 보여주는 증거인
셈이다.
3,000년 전 중국 북방의 투구를 쓴
전차인 복원도
황제–치우 신화에 비친 ‘동두철액(銅頭鐵額)’
중국 신화에서 중국과 치우와 황제의 탁록 전투는 동아시아판 ‘아마겟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국 고대 신화에서 가장 격렬한 전쟁으로 그려진다. 중국 한나라의 사마천(司馬遷)이 지은 《사기(史記)》에도 기록되어 있긴 하지만, 신화의 시대인 ‘오제본기’편에 나오는 내용인지라 애매한 부분이 많다.
그런데 치우와 그 형제를 기록한 대목에서 외양이 ‘구리 머리와 쇠 이마(동두철액)’이라고 되어있다는 점이다. 하가점상층문화의 금속제 투구가 연상된다. 아마 중국 사람들이 보기에 적장들이 쓰고 있던 반짝거리는 금속제 투구의 기억이 너무나 강렬해 그러한 이야기가 남은 것은 아닐까. 실제로 탁록을 둘러싼
허베이–랴오시 지역에서는 기원전 12세기 무렵부터 청동 투구가 유행했고, 이는 북방 여러 집단을 거쳐 몽골·바이칼 방면으로 확산됐다. 문헌으로만 본다면 치우에 대한 언급은 한대(漢代) 이후에 본격화된다. 이때에는 이미 치우는 중화 문명에 대적한 ‘악의 축’으로 굳어졌고, 황제를 중심 시조로 세우는 서사
속에서 주변 집단의 상징이었던 치우는 ‘괴물’로 번역됐다. 시베리아의 전차 문화가 기원전 15세기경 동아시아로 파급되며, 북방 세력이 중원과 대규모로 맞닿는 사건이 잦아졌다. 그리고 그들과 맞서 싸워야 했던 상나라와 주나라 시기에 이민족에 대한 공포가 반영된 것이었다. 청동투구를 쓰고 전차를 몰던 적장의
모습은 대를 이어 그러한 신화로 이어진 것은 아닐까. 사실 전쟁만큼 선진기술을 빨리 이동시키는 것이 없다. 신화에 기록된 수많은 전쟁은 바로 ‘기술과 이동’의 역사가 기억되고 때로는 과장되어 전해진 것이다.
투구가 우크라이나까지 이어지는 이유는?
흔히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는데, 이는 특히 고고학을 보면 절감한다. 왜냐하면 하가점상층문화와 고조선식의 투구는 멀리 흑해연안에서까지 발견되기 때문이다. 흑해 연안 스키타이 유적에서 약 2,700년 전부터 독특한 형태의 투구가 발견되어서 러시아 고고학자들은 그것을 ‘쿠반식’ 투구라고 명명했다. 그 지역에서
전례가 없는 이 투구는 바로 하가점상층문화의 투구와 전체적인 형태는 물론 리벳을 박는 구멍들도 모두 같았다. 우연이 아니라 실제 무기를 사용하던 전사나 기술자가 건너간 증거라 밖에 볼 수 없었다. 필자도 청동 투구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유라시아 각 지역의 자료를 모아보니 실제로 카자흐스탄, 몽골, 신강성 등
그 중간 지역의 곳곳에서 하가점상층문화의 투구가 발견됐는데 서로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비슷하다. 학계는 북부 초원 벨트의 장거리 교류(기술·장인·형식)가 서에서 동으로, 동에서 서로 흐른 결과로 본다.
만주와 우크라이나는 먼 것 같지만, 사실 역사를 보면 그들은 결코 멀지 않다. 바로 유라시아 초원지대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흔히 유라시아를 제패한 것은 칭기즈칸의 몽골제국이라고만 생각하지만, 사실 그 역사는 그 이전부터 이어져 왔었다. 2,000년 전 흉노가 중국과 남흉노에게 패망하자 그들의 일파는
300년간 유라시아 초원에 있다가 이후 유럽의 훈족으로 등장했다. 그 뒤를 이어서 유연족은 헝가리 일대의 아바르로 이어졌다. 돌궐(투르크)의 일파도 흑해일대에 그 흔적을 남겼으니 크림반도에는 19세기 말까지 ‘크림 타타르’라는 투르크계통의 나라가 있었다. 이렇게 이어지는 이유는 유라시아 초원의 특성이다.
중국 북방의 만리장성이 놓인 곳에서 지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한창이 드네프르강 일대까지 유라시아 초원은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푸른 목초지를 찾아가고 때로는 서로 다투며 전투를 벌이는 유목민의 특성을 감안한다면 유럽까지 가는 것은 전혀 문제가 없을 것이다. 거대한 하이웨이인 유라시아 초원을 따라서
첨단의 무기가 오갔고, 3,000년 전에는 동북아시아의 청동투구도 함께 건너간 것이다.
흑해연안 스키타이 시대 고분인 켈레메스 유적에서 발견된 하가점상층문화 스타일의 청동 투구
투구를 쓴 고구려의 전사. ©중국 오녀산성박물관
21세기에 바라보는 투구
인간 진화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머리를 지키는 투구는 인간이 가진 생명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권력에 대한 집착이 모인 가장 상징적인 유물이었다. 지금은 박물관에서 시퍼런 녹이 슬어서 얼핏 초라해 보이게 진열된 투구이지만, 가만히 보노라면 그 투구를 쓰고 있었던 전사의 죽음에 대한 공포, 그리고 적에 대한
살의를 표현하는 권위와 같은 수많은 느낌이 스쳐 가는 듯하다.
수천 년간 전차와 말, 금속기술과 전사 집단이 이동한 유라시아 초원의 길은 오늘도 지도를 가른다. 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북한군이 참전해 그 판도를 심하게 바꾸었고,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은 빠르게 남한의 무기를 도입하려 하고 있다. 3,000년을 두고 이어지는 두 지역 간의 관계는 참으로 흥미롭다.
3,000년 전 북방벨트에서 투구·전차·무기가 ‘지리의 길’을 따라 이동했듯, 오늘의 전쟁도 철도·항만·동맹 네트워크라는 현대판 ‘초원 길’을 통해 병력과 장비가 흐른다. 탁록의 신화가 기록한 것은 특정 영웅의 승부가 아니라, 북방과 중원의 충돌–흡수–재배치라는 일련의 사건이 윤색되어 그려진 것이다.
3,000년 전 유라시아를 가로질렀던 전차와 하가점상층의 투구의 길을 지금은 한국의 K9자주포가 지나가는 것을 보니 “역사는 반복된다”라는 수없이 들어본 이야기가 다시 되새겨진다.
몽골에서 출토된 청동 투구 Ⓒ몽골과학원
서기 6~7세기 영국 서튼후에서 발굴된 이스트 앵글리아왕국의
무덤에서 발굴된 투구다. 유럽 최고의 유물로 꼽힌다.
Ⓒ영국 브리티시박물관 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