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다수의 민중을 삶의 나락으로 몰아넣기도 했지만,
한편에서는 위대한 힘으로 나라를 구한 영웅들을 탄생시켰다.
평시에는 잘 드러나지 않던 담력과 결단, 헌신
그리고 지도력이 전쟁이라는 위급한 상황을 만나
그 진가를 드러내는 것이다.
2차 고려 거란전쟁(이하 ‘여요전쟁’)에서
큰 활약을 펼친 하공진도 그런 인물이다.
글. 박건호(역사작가)
일러스트. 김성삼
*일러스트 속 복식은 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을 참고했습니다.
외교로 거란을 물리치다
고려시대 현종 즉위년인 1010년에 거란(요)의 성종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다. 2차 여요전쟁의 시작이었다. 강조가 정변을 일으켜 목종을 폐하고 현종을 옹립한 일을 빌미로 삼았다. 고려의 실권자 강조가 친히
고려의 주력 30만 대군을 이끌고 나아가 강동6주 중 하나인 통주에서 맞서 접전을 벌였지만 결국 패배했고, 강조 자신도 죽임을 당했다. 통주 전투에의 승리 이후 거란은 서경, 개경을 함락하며 파죽지세로 남하했다.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 현종은 개경을 버리고 전남 나주를 향해 몽진을 떠나게 된다.
이때 하공진(河拱辰, ?~1011)이 등장한다. 그는 진주 사람으로 성종 때 압록강 국경 방비를 담당한 구당사(勾當使)라는 관직부터 시작해서 목종 때 중랑장, 상서좌사낭중으로 승직된 무신이었다. 하공진은 양주에
머물고 있던 현종을 만나 “거란이 본시 역적을 정벌한다는 구실로 출병했는데 그들이 이미 강조를 죽였으니 이때 사신을 보내 강화를 제의하면 그들은 틀림없이 철수할 것”이라며 자신에게 협상을 맡겨달라고 건의했다. 전쟁의
빌미가 제거되었으므로 거란도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 명분이 사라졌음을 간파한 것이었다. 현종은 이 건의를 받아들여 하공진을 거란 측에 보내 뜻을 전하게 했다. 그런데 하공진이 거란 황제가 있는 곳으로 가는 도중
창화현에서 거란 선봉대와 만나게 되는데, 그곳은 현종 일행이 있는 곳과 불과 10여 리밖에 떨어지지 않은 거리로 자칫하면 국왕이 사로잡힐 수도 있는 위급한 상황이었다. 그곳에서 하공진은 고려의 운명을 걸고 거란
선봉대와 대화를 주고받는다.
먼저 거란군이 고려 국왕이 어디 있는지를 물었다. 하공진은 “지금 강남(江南)으로 가고 계시는데, 계신 곳을 알지 못한다”고 대답한다. 그러자 거란은 다시 “그 강남이 먼가? 가까운가?”라고 되묻는다. 이에 하공진은
거짓으로 “강남은 아주 먼 곳이라 몇만 리가 되는지도 잘 모르겠다”라고 하니, 고려 지리에 밝지 못했던 거란 선봉대는 결국 추격을 포기하고 발길을 돌리게 된다.
이 장면은 고려 외교사의 결정적 장면이다. 고려에는 서희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공진도 있었던 것이다. 굳이 비교해 보자면 서희가 거란의 소손녕과 담판해 강동 6주를 얻은 1차 여요전쟁 때보다 2차 전쟁이 훨씬 암담한
상황이었다. 거란군에 맞설 중앙군은 거의 소멸했고, 국왕은 호위병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피난을 가는 상황이었다. 이때 만약 하공진이 거란 선봉대의 발길을 되돌리지 못했다면, 고려는 훗날 조선의 병자호란과 비슷한
수모를 당했거나 아니면 더 나아가 나라가 망했을 수도 있었다.
거란 선봉대 발길을 돌리게 한 하공진은 얼마 후 거란 본영에 찾아가 거란 황제를 직접 만나 현종의 친조(親朝; 국왕이 직접 찾아가 알현함)를 조건으로 거란의 철군을 요구했다. 강조의 죽음으로 전쟁의 명분은 사라진
터였고, 현종의 친조 정도면 그들이 철군하는 데 있어 충분히 체면을 살려 줄 수 있는 조건이었다. 거란 황제가 이런 하공진의 제안을 수용함으로써 거란군은 결국 고려에서 철군하게 된다.
나라를 위해 포로가 되다
하공진은 협상을 통해 거란을 물러가게 했지만, 거란 황제는 철군하면서 그를 거란으로 데려가 억류한다. 일종의 인질이었던 셈이다. 거란에서 하공진은 겉으로는 거란 황제에게 충성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내심으로는 탈출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거란 황제는 그를 고려와 더 멀리 떨어진 지역으로 보내고, 거란 처녀를 배필로 정해 주기도 했다. 《고려사》에는 거란 황제가 하공진을 “심히 아끼고 우대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하공진은 마지막까지 고려의 신하로 남고자 했다. 그는 비밀리에 좋은 말들을 사서 고려로 가는 길목 곳곳에 배치해 두었다가 때가 되면 이를 갈아타면서 탈출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계획은 결국 탄로 났고, 이로 인해 하공진은 거란 황제 앞에서 문초를 받게 된다. 계속 자신의 신하로 남기를 요청하는 거란 황제에게 하공진이 했던 말은 짧고 강렬했다. 《고려사》 기록이다.
“저는 우리나라(고려)를 감히
배반할 수 없습니다.
죄는 만 번 죽어도
마땅하나
살아서 대국(거란)을 섬기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臣於本國, 不敢有二心.
罪當萬死, 不願生事大朝).”
이런 하공진을 의롭게 여긴 거란 황제는 재차 설득하고 달래었으나, 하공진은 그 뜻을 끝내 굽히지 않았다. 분노한 거란 황제는 결국 하공진을 죽이게 된다. 하공진이 거란에 온 지 대략 1년이 되는 1011년
12월이었다. 하공진의 최후는 매우 끔찍했는데, 2차 여요전쟁의 영웅 양규 장군의 죽음만큼이나 비극적이었다.
양규는 1,700명의 군사를 이끌고 회군하는 거란군을 추격하여 한 달 동안 7번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고려인 포로 3만 명을 구출한 인물이다. 《고려사》는 “마치 고슴도치같이 화살을 맞아서 전사했다”고 양규의 마지막을
전하고 있다. 하공진의 죽음은 이러했다.
“드디어 그를 죽였는데 거란 군사들이 앞다투어 그의 염통과 간을 꺼내 먹었다.”
고려, 그를 기억하다
먼 이국에서 비참하게 하공진은 죽었으나, 고려는 영민한 외교로 나라를 구한 충신을 결코 잊지 않았다. 벼슬을 추증하거나 아들에게 벼슬을 하사하는 등 그를 기리고 추모했다. 죽음 직후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고려사절요》는 1110년 예종 5년 9월 왕이 종친과 고위 관료들을 천수전에 불러 잔치를 베풀었을 때 있었던 일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어느 광대가 연극으로써 선대의 공신 하공진을 칭송하니,
왕은 그 공을 추념하여
그 현손 위위주부(衛尉主簿) 하준을
합문지후로 삼고 시를 짓고 하사했다.”
이는 하공진이 죽은 지 무려 100년 뒤의 일이었다. 고려인들 사이에 하공진의 업적은 이처럼 널리 알려졌었고, 그때까지 그를 기리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여기가 끝이 아니다. 그가 죽은 지 300년이 지난
후인 1308년 충선왕이 내린 교서에서도 하공진의 후손을 우대하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나라의 안위를 위해 기꺼이 자기 목숨을 바친 사람, 그리고 나라가 망할 때까지 그를 잊지 않고 기리는 국가! 이것이 고려가 500년 가까운 역사를 이어나간 저력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