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서 시작된 기준

단위가 오늘날처럼 하나의 통일된 규칙으로 자리 잡기 전에 나라별로 각기 다른 기준으로 세상을 측정했다. 가장 흔하게 사용했던 건 우리 몸이었다. 알려진 단위 중 가장 오래된 길이 단위는 큐빗(Cubit)인데 팔꿈치에서부터 손가락 중지 끝까지의 길이를 1큐빗으로 삼았다. 이 단위는 고대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로마 등 여러 문명권에서 19세기까지 사용했다.
여기서 궁금증이 생긴다. 사람마다 팔 길이가 다른데 어떻게 정확한, 동일한 측정이 가능했을까? 고대 이집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파라오의 팔 길이를 기준으로 삼은 ‘로열 큐빗’을 만들었다. 정밀함을 위해 매달 보름달이 뜨는 날, 왕실 건축가와 감독관들은 자신들의 자를 로열 큐빗
마스터와 비교하며 정확도를 점검하는 의식까지 치렀다. 만약 자의 규격이 다르면 죽음에 이르게 되는 혹독한 벌을 받았다. 덕분에 피라미드처럼 거대한 건축물도 정교하게 지을 수 있었다.
이렇게 사람의 몸을 기준으로 삼는 단위는 필연적으로 개인별 차이라는 한계에 부딪힌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 시대의 가장 권위 있는 인물, 즉 왕의 신체가 기준으로 채택되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예가 12세기 영국의 헨리 1세다. 그는 국가 행정과 재정을 체계적으로 정비하고자 단위 표준화를 추진하며,
그 기준을 자기 몸으로 삼았다. 자신의 코끝에서 엄지손가락 끝까지의 거리인 0.9144m를 1야드(Yard, yd)라고 선포했다. 이 주관적인 길이가 오늘날 야드파운드법의 핵심 길이 단위가 된다. 1야드의 깔끔하게 떨어지지 않는 숫자의 ‘범인’은 바로 헨리 1세의 몸이었던 셈이다. 그는 팔뿐만 아니라 자기
발까지 단위로 만들었다. 발뒤꿈치에서 엄지발가락 끝까지의 길이를 풋(Foot)으로 정의했는데, 이 단위가 우리가 익숙하게 사용하는 피트(Feet, ft)의 단수형이다. 1ft는 약 0.3048m이니, 헨리 1세의 발 길이가 꽤 길었나보다.
이 외에도 고대와 중세 시대에는 여러 신체 기반 단위들이 있었다. 손바닥을 활짝 펼쳤을 때 엄지손가락과 새끼손가락 사이의 길이를 스팬(Span)이라 불렀고, 엄지손가락을 제외한 네 손가락의 폭은 팜(Palm)이었다. 지금도 쓰는 인치(Inch)는 엄지손가락의 폭을 기준으로 삼았다. 마지막으로
디지트(Digit)는 손가락 하나의 폭인데, 현대 정보 기술 용어인 ‘디지털(Digital)’의 어원이 됐다.
거대한영향력, 야드파운드법

우리는 흔히 1m, 10cm처럼 미터법을 쓰지만, 세상에는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지닌 또 다른 단위 체계가 있다. 바로 야드파운드법이다. 이것은 미국만의 단위가 아니다. 유럽에서 오랫동안 쓰이던 다양한 단위를 영국이 1824년에 정리한 독자적인 체계다. 지금도 영국, 미국, 미얀마, 일부 카리브해 국가에서 여전히 건재하다.
영국은 1898년 공식적으로 미터법을 채택했지만, 아직 도로 표지판엔 mile이 붙고, 맥주는 여전히 pint(파인트) 단위로 팔리며, 몸무게도 kg보다는 st(스톤)이나 lb(파운드)가 익숙하다. 미터법을 받아들였어도 일상생활은 여전히 야드파운드법에 길들어 있는 셈이다.
미터법이 1m를 기준으로 센티(1/100), 킬로(×1,000) 같은 접두어를 붙여 쓰지만, 야드파운드법은 훨씬 다양하고 복잡하다. 용도에 따라 수많은 단위가 존재하는데 길이만 해도 다우, 인치, 피트, 야드, 체인, 퍼롱, 마일, 리그 등 끝이 없이 이어진다. 여기서 마일(mile 또는 mi)은
도로표지판, 지도, 내비게이션, 항공노선과 비행거리 등에서 사용되고 있다. 마일에서 유념할 점은 1mile은 육지와 하늘, 바다와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육지에서 1mile은 1609.344m인데, 하늘과 바다에서는 1mile은 1,852m다. 이 둘을 구별하기 위해 바다와 하늘은 nautical
mile(해리)로 구별해 사용한다. 해리는 대항해시대에서부터 사용되는 단위인데 1해리는 지구 위도 1°에 해당하는 길이다.
그렇다면 영국은 왜 자신들이 만든 야드파운드법을 놔두고 미터법을 받아들였을까? 답은 간단하다. 교역 때문이다. 1970년대, 호주·뉴질랜드·캐나다 등 영국과 관계 깊은 나라들이 하나둘 미터법으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교류하는 나라가 모두 미터법을 쓰기 시작하니, 결국 미터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정작 이
야드파운드법을 지금까지 가장 충실히 지키는 나라는 미국이다. 1783년 영국에서 독립한 미국은 ‘영국의 그늘에서 벗어나자!’라며 도량형도 바꿔보고 싶었지만, 워낙 땅덩어리가 넓고 이미 다양한 단위가 쓰이던 터라 쉽게 통일이 되지 않았다. 몇몇 대통령이 도량형을 통일하려 애썼지만, 국민들은 “굳이 바꿀 필요
있나?”라는 입장이었다. 1866년에야 미터법이 합법화됐지만, 사용 의무는 없었다. 결국 미국은 지금까지도 미터법과 야드파운드법을 혼용해서 사용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미터법 국가지만, 미국에서 수입한 무기가 많아 방산분야에서는 인치, 톤, 피트 같은 야드파운드 단위도 사용한다.
암행어사의 필수품은 마패뿐만이 아니었다

“암행어사 출두요!” 이 말과 함께 육모방망이를 든 역졸들이 우르르 몰려나오고, 기생, 이방, 사또는 혼비백산 모습. 그 틈을 헤치고 느릿하게 등장하는 암행어사와 함께 척하고 등장하는 마패. 이 장면은 너무도 익숙한 암행어사의 등장 장면이다. 암행어사는 조선 성종 때부터 고종 때까지 존재했던 임시 관직으로,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퇴계 이황 등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인물들이 암행어사를 거쳤다. 우리가 흔히 ‘암행어사의 아이콘’으로 떠올리는 박문수는 사실 아이러니하게도 단 한 번도 ‘암행’어사가 된 적이 없다. 그는 당당히 신분을 드러내고 활동한 어사였다.
이쯤 되면 “단위 이야기하다가 왜 갑자기 암행어사?” 싶겠지만, 바로 암행어사가 마패 외에 또 다른 중요한 물건을 지녔기 때문이다. 암행어사로 발탁되면 왕에게 네 가지 특별한 물건을 하사받는다. 잘 알려진 마패는 물론, 봉서, 사목 그리고 유척이다. 마패는 신분을 상징하는 도구이자, 전국을 누비며
역마(역참의 말)를 사용할 수 있는 일종의 ‘공무원 패스권’이었다. 봉서는 어사 발령장으로, 겉면에는 “사대문 밖에서 열어 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사목은 어사의 구체적인 직무 내용이 적힌 일종의 ‘업무 매뉴얼’이다.
그렇다면 마지막 유척은 무엇일까? 유척은 놋쇠로 만든 ‘국가 인증 자’다. 길이는 약 20cm 안팎으로, 사각형 몸통에는 눈금과 여러 한자가 새겨져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조선시대 도량형을 대표하는 다섯 가지 척(尺)도가 적혀 있다. 곡식을 재는데 사용하는 영조척, 제사 관련 물품을 제작할 때 사용되는
예기척, 포목의 길이를 재는 포백척, 악기 제작에 쓰이는 황종척, 토지 길이를 재는 주척이 그것이다.
암행어사는 왜 자를 들고 다녔을까? 당시 조선은 세금을 화폐가 아니라 곡식, 천, 특산물 같은 현물로 거뒀다. 그런데 수령들이 도량형 기구 눈금을 조작해 슬쩍 착복하는 일이 있었다. 예를 들면 세금을 걷을 땐 일부러 큰 됫박을 쓰고, 백성에게 나눌 땐 작은 됫박으로 퍼주는 식이다. 바로 이런 부정을 바로잡기
위한 기준이 유척이었기에 암행어사의 필수품이 됐다. 이 유척은 현대 드라마에도 등장한 적이 있다. 바로 드라마 <검사내전>에서다. 이선웅(이선균 분)이 서랍 속 유척을 꺼내 맥주 병따개로 사용하는 장면. 이 유척은 과거 사법연수생 시절, 지도교수가 제자에게 전해준 상징적인 선물이었다. 누군가의 유척을
이선웅이 사용하는 모습을 보고 수석으로 졸업했지만 유척을 받지 못한 차명주(정려원 분)가 경쟁심을 품게 하는 도구로 사용됐다. 공정함의 상징, 유척. 조선의 부패를 바로잡는 상징이 현대 법조 드라마에서 등장한 건 어쩌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작을수록 강력한 길이

과학이 발달하면서 우리는 더 이상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사는 시대에 머물지 않게 됐다. 정확히 말하면 이제는 보이지 않는 것까지 측정하고 표현할 수 있게 된 시대가 된 것이다. 마이크로미터(µm)와 나노미터(nm) 이야기다.
먼저 마이크로미터부터 살펴보자. 이 단위는 1960년대 국제단위계(SI)에 공식적으로 도입됐다. 기호는 µm, 1마이크로미터는 1m의 백만 분의 1(10-6m)에 해당한다. 감이 안 잡힌다면 밀리미터로 바꿔보자. 1µm는 0.001mm, 즉
1mm를 천 조각으로 쪼갠 것 중 하나라는 얘기다. 그래도 여전히
감이 안 온다고? 그렇다면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로 예로 들어보자. 사람의 머리카락 굵기는 평균 약 70µm, 거미줄 가닥은 3µm, 꽃가루는 20~50µm, 안개는 약 10µm 정도다. 봄마다 우리를 괴로워하는 미세먼지는 직경 10µm 이하, 초미세먼지는 2.5µm 이하로 정의된다. 그래서 미세먼지를 표시할
때 PM10(10µm 이하), PM2.5(2.5µm 이하) 같은 표기를 쓴다. 여기서 PM은 Particulate Matter, ‘입자상 물질’의 약자다. 참고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0.1µm 크기다. 여기까지 작아지면, 이제 현미경이 절실하다.
마이크로미터보다 더 작은 단위가 있다. 바로 나노미터(nm)다. 나노미터는 1m의 10억분의 1(10-9m)이다. 엄청나게 작다. 너무 작아서, 단위 이름 자체도 ‘난쟁이’를 뜻하는 그리스어 ‘nanos’에서 왔다. DNA 1가닥의 지름
2.5nm, 코로나19 바이러스가 60~150nm
사이의 크기였다.
분자도 nm로 표현되는데 물(H2O)분자는 약 0.2nm, 염분(NaCl) 분자는 약 3.7nm 정도다. 이쯤 되면, 이 단위는 과학자들의 전유물 같지만, 사실 우리 삶 속에서도 이미 나노미터 스케일의 기술은 깊숙이 들어와 있다. 스마트폰, AI를 구동하는 초고속 컴퓨터, 자율주행
시스템은 나노미터 단위
반도체 기술 덕분에 가능해진 것들이다. 나노기술은 반도체뿐 아니라 신소재, 의료, 환경 분야에서도 활약 중이다. 예를 들어 연잎을 모방한 초발수 코팅제, 자외선 차단 나노 입자 화장품, 초미세먼지를 거르는 고성능 필터 등이 모두가 나노기술의 산물이다. 그리고 이 기술은 방위산업 분야에서도 강력한 무기가
된다. 초정밀 센서, 고성능 레이더, 소형 유도무기, 신소재 기반 방탄 및 스텔스 기술까지 작고 정밀한 기술이 무기를 더 스마트하게 만든다. 마이크로미터와 나노미터는 단순한 ‘작은 숫자’가 아니라 우주처럼 거대한 가능성을 품은 작은 단위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