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수의 기원

글. 강인욱(고고학자, 경희대학교 사학과 교수)

인간의 역사에서 전쟁은 언제나 함께였다. 그 피의 역사는 인간의 기술과 함께했으니, 인간 역사는 그사이 등장한 수많은 첨단 무기의 역사이기도 하다. 전쟁의 패턴이 다양하게 바뀌어서 비행기가 날고 미사일을 쏘아도 결국 보병이 상대방의 수도에 깃발을 꽂아야 끝나는 것이 전쟁이다. 실제 전쟁을 수행하는 보병의 개인화기야말로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가장 핵심적인 병기였다. 지금의 총에 해당하는 개인 무기는 바로 활이다. 화약의 등장과 함께 그 위협이 많이 감소했다고 해도 지난 수만 년간 활과 화살에는 인간이 발달시킨 수많은 기술이 녹아들어 있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그리고 멀리 화살을 쏘았던 부대의 몫이었으니 그 사소해 보이는 활의 역사야말로 진정한 인간 전쟁의 한 과정이라 할 수 있다. 활이라고 다 똑같은 것은 아니니 근거리 무기의 혁신을 이룬 복합궁과 기마민족의 역사를 살펴보자.

유목민이 발명한 복합궁

진정한 활의 혁명은 빠르게 이동하면서 전쟁을 벌였던 초원에서 탄생했다. 말을 타고 활을 쏘던 유목민들은 독특한 활인 복합궁을 개발했다. 활의 끝부분은 뼈로, 가운데는 나무로 만든 구조였다. 서로 다른 재질의 조합으로 활의 탄성이 훨씬 커졌고, 그 결과 훨씬 먼 거리까지 화살을 보낼 수 있었다. 여기에 날랜 말을 타고 전투까지 벌였으니 그들의 기동성은 상상을 초월했다. 이 초원의 전사들이 발명한 복합궁은 곧 고대 근동 지역으로 유입됐다. 복합궁은 약 4,300년 전 아카드 왕조의 조각품에서 처음 나타난다. 이집트에서는 약 3,800년 전 힉소스인들의 침략에서 사용된 것을 보고 본격적으로 만들기 시작했으며, 이집트의 복합궁은 투탕카멘왕의 무덤을 비롯한 여러 왕의 무덤에서 발견된다.

복합궁은 가볍고 사거리가 길지만, 뼈와 나무를 단단히 접착해야 하는 고도의 기술이 요구됐다. 유라시아 초원의 기마전사들은 아교로 뼈와 나무를 접착한 활을 마치 자신의 분신처럼 아꼈다. 원정 중에도 틈만 나면 활을 풀어 짐승 뼈를 녹인 접착제를 이용해 다시 수리하곤 했다. 특히 스키타이 왕족 무덤에서는 그러한 활을 다듬는 장면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군대에서 틈날 때마다 개인화기를 분해하고 정비하는 문화는 아마도 스키타이 궁수에게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스키타이 궁수는 날렵한 기마전술과 결합해 중국 북방까지 점령했고, 이는 흉노 제국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물론 복합궁은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수시로 조이고 푸는 작업이 필요했으며, 무더운 날씨에는 아교가 녹아 활이 무용지물이 되기도 했다. 실제 중국 역사 기록에서도 흉노의 패퇴 원인 중 ‘날이 더워져서 활이 풀어지니…’라는 기록이 있다. 얼핏 과장으로 들릴 수 있지만, 나무와 뼈를 접합하는 일은 매우 까다로운 작업이다. 적절한 뼈와 목재 확보는 물론, 사용 환경에 맞는 접착제 제조까지 요구됐기 때문이다.

칭기즈칸의 몽골 제국도 복합궁의 힘으로 유럽까지 진출했지만 남쪽으로는 거의 나아가지 못했다. 그 배경에는 복합궁을 잘 쓸 수 없는 기후 조건도 있었을 것이다.

아부심벨 사원의 람세스2세, 복합궁을 겨누고 있다.

농경민의 선택: 석궁

날랜 유목민의 복합궁이 기세를 올리자 중국은 그에 맞서는 무기를 개발했으니, 바로 석궁(Crossbow)이었다. 활을 장전할 때 온몸의 힘을 쓰기 때문에 장력을 최대한으로 늘릴 수 있었다. 미리 장전해 두어서 쏠 수도 있고 활보다 간단한 사용법에 정확도도 높았다. 하지만 단점도 있었으니 석궁이 무겁고 말 위에서는 쓸 수 없었다. 게다가 장전 속도도 월등히 느리다. 그리고 석궁을 발사하는 노리쇠는 청동을 이용한 기계장치로 숙달된 장인집단이 필요했다. 석궁은 농사를 지으며 인구가 많은 중국에서 적합한 무기였으니, 군사를 단체로 조련시켜서 시차를 두고 활을 쏘거나 성이나 진지를 지키는 용도로 사용됐다. 진시황의 병마용에 가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자세가 있다. 바로 석궁에 활을 거는 자세를 묘사한 것이다. 석궁은 유럽에서 한참 뒤인 중세시대에 널리 유행하는 무기가 됐다.

복합궁과 석궁의 관계는 마치 제2차 세계대전과 6·25전쟁에 주요 개인화기였던 M1 개런드와 카빈총의 관계와 아주 유사하다. 개런드는 무거워 불편했지만 강력한 위력으로 보병들이 전쟁할 때 확실히 믿을 수 있는 총이었다. 반면에 카빈총은 총신의 길이를 짧게 하고 무게를 줄인 것으로 휴대가 편하게 기마병사를 위해 개발한 것이다. 물론, 경량화한 만큼 위력과 관통력도 개런드보다는 떨어졌다. 6·25전쟁에서 위력을 발휘한 것은 카빈총이었다. 한국인은 상대적으로 체구도 작았고 가파른 산악지대가 많았기 때문에 카빈총의 효용이 더 높았기 때문이다.

활의 민족인 고대 한국

한국도 활이 고대부터 발달했었다. 석궁과 복합궁 모두 한국에서는 기원전 1세기경부터 등장한다. 석궁은 중국을 통해서 들어왔고, 복합궁은 ‘각궁’이라고도 불렸다. 두 활이 도입되기 전부터 한국은 이미 2~3만 년 전 구석기시대의 말기부터 다양한 화살촉이 등장했다. 당시는 빙하기 시대로 돌을 깨서 날카롭게 날을 세우는 좀돌날이 등장하여 마치 면도칼같이 날카로운 화살촉을 만들어 사용했다. 이후 신석기시대를 거쳐서 다양한 크기와 석재를 이용한 화살촉이 등장했다.

공자가 진나라에서 식객으로 살면서 훗날을 도모하고 있을 때 동이족의 화살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우연히 진공이 밤에 날아가는 철새인 기러기의 날갯죽지에 꽂혀있는 화살을 발견하고 잡아 와서 보니 난생처음 보는 돌로 만든 화살촉이었다. 이에 나라 안에서는 아는 사람이 없어서 당시 최대의 지식인인 공자에게 물어보니 명쾌하게 ‘이것은 숙신(지금의 읍루와 같은 극동지역의 사람)의 것이다’라고 쉽게 평가를 내려주었다.

여담이지만, 공자의 평가는 실제 고고학과 생물학적 연구와는 다르다. 기러기가 아무리 철새이기로서니 현재 러시아 연해주와 지린성 일대에서 중국의 산둥반도까지 날아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아마 당시 중국 북방(지금의 몽골?) 일대에서 내려왔을 가능성이 더 크다. 어쨌거나 ‘시계 하면 스위스’, ‘보드카 하면 러시아’ 같은 식으로 동이족들의 화살이 유명했던 것 같다.

때마침 한국에서도 3,000년 전 화살의 역사를 증명하는 귀한 유물과 춘천 천전리의 청동기시대 집자리에서 활촉과 화살대 일괄세트가 한 무더기 통째로 발견됐다. 활대와 함께 발견된 진귀한 예이다. 그리고 그 활대의 나무를 분석해 본 결과 싸리나무로 밝혀졌다. 공자가 감정해 준 화살도 싸리나무이니 아마 당시 싸리나무 화살대가 널리 유행했던 것은 아닐까.

동이족의 화살이 널리 위세를 떨친 데에는 아마 두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첫 번째는 화살에 바른 독이다. 아무리 화살을 세게 쏘아도 적이나 동물을 죽이는 살상력을 언제나 답보하기는 어렵다. 그러니 화살의 겉에 독을 발라서 쏘는 것이다. 특히 사냥할 때 사슴의 뒷다리라도 맞춘다면 당장 죽지는 않더라도 서서히 몸에 독이 퍼져서 달리는 속도가 느려져 결국 잡히는 원리이다. 숙신의 후예인 읍루인들은 실제로 청석(靑石)으로 만든 화살촉에 독을 발라서 스치기만 해도 죽는다고 공포에 떨었다. 스치기만 해도 죽는 화살이라니 당시로서는 엄청난 생화학무기가 등장했다고 두려워한 셈이다.

또 다른 궁수의 등장은 동이족이라는 한문에서 유래한 큰 화살이다. 옛날 사전에 대궁(大+弓=夷)을 합쳐서 쓴 것이라고 되어있다. 매우 그럴듯한 해석이다. 큰 화살을 쓰는 이유는 상대적으로 탄성력을 많이 얻기 위한 것이다. 때로는 1명이 아니라 2~3명이 힘을 합쳐서 상대방보다 더 먼 거리에서 강력한 화살을 날릴 수 있다면 그야말로 천하무적이었으니 모두 두려워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고고학적으로 이 거대한 활의 증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활 자체가 잘 썩어 없어지는 유기물질이라 발견된 적이 없다. 다만 가끔 창인지 화살촉인지 애매할 정도로 큰 사이즈의 화살촉이 있으니, 혹시 그러한 거대한 활의 증거인지 모르겠다. 실물은 아니어도 고대 벽화나 암각화에 다양한 궁수의 흔적이 나오지만 아쉽게도 그러한 거대한 활의 흔적은 아직 발견된 바 없다. 대신에 근대의 일본 사무라이나 조선의 군대에서 거대한 활이 보이니, 어쩌면 거대한 활의 신화는 근대 이후에 만들어진 것일 가능성도 있다.

쿨오바 고분에서 발견된 2,400년전 스키타이인의 황금 유물 복합궁을 수리하는 장면
궁수가 새겨져 있는 청동도끼, 기원전 1200-600년 이란 루리스탄 지역 출토
춘천 천전리 출토 화살촉 Ⓒ 국립중앙박물관

인류의 역사를 바꾼 무기

복합궁, 석궁 그리고 대형 활 등 인간은 수많은 화살을 만들어서 사용해 왔다. 그들 중에 무엇이 더 좋은 무기인가 하는 논의는 의미가 없을 것이다. 각자의 환경에 맞는 무기를 만들어내는 쪽이 성공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 궁수가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하여 관리하는 것 또한 중요하기 때문이다. 총과 같은 활과 화살, 복합궁과 석궁은 단순한 무기를 넘어 전장을 변화시키고 인류 역사의 흐름을 주도한 도구였다. 그러나 결국 무기는 기술이 아니라 병사의 손끝과 정신에서 진정한 힘을 발휘한다. 고대 궁수들이 시위를 당기던 긴장감은 오늘날 첨단 개인화기를 다루는 군인들의 집중력과 신념으로 이어진다. 우리가 군인의 무기를 연구하고 이해하는 이유는 그것이 곧 군인의 정신, 전우애, 사명감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활의 역사는 곧 군인의 역사이며, 병사의 품격과 정신은 어떤 시대, 어떤 무기 앞에서도 변함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