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길, 절기
여름만 되면 꼭 달력을 보게 하는 날이 있다. 초복, 중복, 말복, 바로 복날이다. 삼계탕 같은 보양식을 먹는 풍습 덕분에 익숙하지만, 사실 복날은 우리가 아는 24절기가 아니다. 생활 속에서 만들어진 속절(俗節)이다. 하지가 지난 뒤 세 번째 경일이 초복, 네 번째가 중복, 입추가 지난 후 첫 번째 경일이
말복이다. 그래서 초복과 중복은 항상 열흘로 간격이 일정하지만, 중복과 말복은 입추에 따라 정의되어서 열흘 차이가 나지 않고 매년 달라진다. 복날은 중국 진·한나라 시절부터 이어져 내려왔고, 지금은 한국천문연구원이 매년 계절 구분과 함께 복날 날짜를 발표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흔히 쓰는 24절기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절기는 태양이 1년 동안 하늘을 따라 이동하는 길, 황도(黃道)를 기준으로 나눈 것이다. 이 궤적을 24등분해 계절의 변화를 표시했는데, 1년이 365일이니 대체로 보름마다 하나씩 돌아온다. 결국 한 달에 두 번꼴로 절기가 있는 셈이다.
절기의 뿌리는 중국 주나라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황허강 주변, 지금의 베이징과 허베이·톈진 일대의 기후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러나 이 지역과 우리나라의 실제 기온과 환경이 달라 그대로 가져오니 우리 체감과 어긋나는 부분이 많았다. 예를 들어 중국에서는 ‘대한(大寒)’이 가장 추운 날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오히려 ‘소한(小寒)’ 때가 더 혹독하게 추워진다. 이 차이를 바로잡은 사람이 세종대왕이다. 그는 우리 땅의 천체 움직임과 위치에 맞춰 《칠정산》을 펴냈고, 그에 따라 새로운 역법을 만들어 계절 구분을 고쳤다. 그 결과 큰 추위는 단순히 가장 매서운 날이 아니라 겨울을 마무리하는 시점으로
해석됐다. ‘대한이 소한의 집에 가서 얼어 죽는다’라는 속담은 바로 우리나라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현재 달력의 근원을 찾아서
지금 우리가 쓰는 달력의 뿌리는 고대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서 비롯됐다. 이전에는 1년을 10개월로만 계산해 농사철만 기록했는데, 이 때문에 날짜가 점점 계절과 어긋나는 문제가 생겼다. 이를 바로잡은 것이 ‘율리우스력’이다. 율리우스력은 윤년제를 도입해 연평균 길이를 태양년과 맞춘 태양력이다. 그는
1년을 365.25일로 정해 4년에 한 번씩 2월에 하루를 더한 윤년제를 도입해 계절과 날짜를 거의 일치시켰다. 윤년의 반복이 모든 연도에 동일하게 적용되니 실제 태양년보다 길어져 128년에
1일 정도의 오차가 누적된 결과, 16세기가 되니 약 10일 정도의 오차가 발생했다. 그래서 교황 그레고리 13세가 다시 손질한 ‘그레고리력’이 지금의 달력이 됐다.
우리가 매일 들여다보는 달력 속에는 고대 로마의 흔적이 여전히 선명히 남아 있다. 바로 12달의 이름이다. 1월(January)은 두 얼굴을 가진 신 야누스(Janus)에서 비롯됐다.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바라본다는 야누스의 성격은 새해의 시작을 상징하기에 딱 맞았던 것이다. 2월(February)은 정화의
축제 ‘페브루아(Februa)’에서, 3월(March)은 전쟁의 신 마르스(Mars)에서, 4월(April)은 사랑과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Aphrodite)에서, 5월(May)은 다산의 여신 마이아(Maia)에서, 6월(June)은 결혼과 가정을 관장하는 유노(Juno)에서 이름을 따왔다. 신들의 이름만
들어도, 당시 사람들의 삶이 종교와 신화에 얼마나 밀접했는지가 드러난다. 그런데 9월부터는 분위기가 달라진다.
9월(September)은 숫자 7(septem), 10월(October)은 숫자 8(octo), 11월(November)은 숫자 9(novem), 12월(December)은 숫자 10(decem)에서 유래했다. 잠깐, 뭔가 이상하지 않나? 이름은 분명히 7, 8, 9, 10인데, 왜 달력에서는 9월,
10월, 11월, 12월을 의미할까?
비밀은 바로 빠진 두 달, 7월과 8월에 있다. 원래 로마력은 10개월뿐이었고, 그때는 September가 실제로 ‘7번째 달’이었다. 하지만 권력 앞에서 달력도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의 탄생 월을 기념해 7월을 July로 바꾸었고, 뒤이어 권력을 잡은
아우구스투스(Augustus) 황제도 지지 않겠다는 듯 8월(August)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그 결과, 이후 달력은 숫자와 달 이름이 어긋난 상태로 굳어져 오늘까지 내려왔다.
그렇다면 ‘달력(Calendar)’이라는 말 자체는 어디서 왔을까? 그 시작은 돈과 관련이 있다. ‘칼렌다리움(Calen darium)’이라는 라틴어에서 비롯됐는데, 이는 ‘회계장부’, ‘흥미로운 기록’을 뜻하는 말이었다.
고대 로마에서 사제들은 초하룻날 밤하늘에 떠오르는 신월(新月)을 보고 큰 소리로 사람들에게 알렸다. 이때 쓰인 말이 ‘칼라레(calare, 외치다)’였다. 이날은 차츰 단순한 종교의식이 아니라 세금이나 빚을 정리하는 중요한 날로도 쓰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채무와 채권을 기록한 장부를 ‘칼렌다리움’이라
불렀고, 그것이 차츰 오늘날 우리가 쓰는 ‘달력(Calendar)’로 의미가 확장된 것이다.

음식이 맛있어지는 시간
요리가 맛있어지는 데는 시간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가장 쉽게 알 수 있는 것이 달걀 삶기다. 달걀 삶기는 시간이 만든 요리를 알 수 있는 가장 간단하면서도 과학적인 요리다. 너무 거창하다고? 이 설명을 들으면 절대 그렇게 느끼지 않을 것이다.
달걀을 들여다보면 흰자와 노른자가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흰자는 수분이 약 89%, 단백질이 약 10%, 노른자는 수분 49.5%, 단백질 16%, 지방 33% 정도다. 즉, 구성이 다르니 당연히 익는 속도도 다르다. 흰자는 80℃ 정도에서 완전히 굳기 시작하고, 노른자는 약 70℃까지 올라가야 완숙이
된다. 그래서 반숙, 완숙, 살짝 덜 익은 달걀까지 온도와 시간을 조절해 가며 삶는 거다. 노른자가 부드럽게 촉촉한 상태는 약 6분 30초~8분, 반숙은 8~10분, 완숙은 11~15분 정도. 만약 완숙을 더 오래 삶으면? 퍽퍽하고 맛이 떨어진다. 이처럼 달걀 하나로 시간의 중요성을 배울 수 있다.
느린 시간이 더해져 맛있는 요리가 되는 대표 주자는 발효 음식이다. 우리나라 대표 음식인 된장, 고추장, 청국장, 김치, 젓갈, 식초 등 다양한 음식이 느린 시간으로 만들어진다.
한가지 예를 들면 엿기름이다. 고추장이나 엿, 조청, 식혜에 들어가는 엿기름을 만들기 위해서는 시간과 정성이 필수다. 먼저 보리나 찰보리를 12~24시간 정도 물에 불리고, 소쿠리에 담아 2~3번 물을 뿌려 싹을 틔운다. 싹이 0.5cm 정도 나면, 보리를 부드럽게 풀고 싹과 뿌리를 제거한 뒤 알갱이만
갈아서 엿기름을 만든다. 마트에서 쉽게 살 수 있긴 하지만, 전통 방식은 인내심이 필요했다. 참고로, 여기서 기름은 오일이 아니다. ‘기르다’의 명사형 ‘길움’이 바뀌었다는 게 정설이다.
이 엿기름이 완성작이 아니기에 다른 음식과 결합해야 진가가 발휘된다. 엿기름으로 만든 대표적인 음식은 식혜다. 식혜로 만들려면 또 시간이 걸린다. 불린 엿기름물을 고두밥에 부어 60℃에서 4시간 정도 밥알을 삭힌 뒤, 냉장 보관을 하고 다시 끓이는 수고가 더해진다. 이렇게 긴 과정을 거쳐야 달콤하고 부드러운
식혜가 완성된다. 우리나라 음식만 그런 건 아니다. 서양에서는 치즈가 긴 시간이 필요한 대표 주자다. 발효와 숙성을 거치면서, 짧게는 수십 분, 길게는 수년이라는 시간으로 만들어진다. 결국 음식 중의 일부가 맛있어지기 위해서는 적절한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멍때리는 시간이 필요해
이메일을 읽는데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실수와 깜빡함이 늘어난 적 있나? 특히 점심 먹고 오후 3시쯤이면 갑자기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는 경험은 누구나 한 번쯤 해봤을 것이다. 이럴 때 우리는 흔히 커피를 마시며 억지로 정신을 부여잡는다. 그런데 이때 최고의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뇌에 ‘잠깐 쉬는
시간’을 주는 것이다.
뇌에게 휴식이란 바로 멍때리기다. “멍때리기라니, 그게 무슨 과학적 근거가 있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있다. 연구에 따르면, 의도적으로 아무 생각 없이 있는 시간이 뇌에는 최고의 휴식이 된다고 한다. 그냥 멍하니 앉아 있을 때 뇌 속의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MN, Default Mode
Network)가 활발히 돌아가면서 혈류가 늘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를 가능성도 높아진다고 한다. 그러니까 수학 문제 풀다가 잠시 멍하니 있다가 갑자기 답이 떠오르거나 산책하면서 “아하!” 싶은 아이디어가 번뜩이는 경험은 다 뇌가 휴식을 취했기 때문이다.
혹자는 멍때리기를 하는 사람이 게으른 사람이라고 깎아내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네덜란드에는 ‘닉센(Niksen)’이라는 문화가 있는데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을 허락하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 시간이 불안을 줄이고 창의력을 높여준다고 말한다. 심리학 연구에서도 자유롭게 떠다니는 생각은 기분을
좋게 하고, 복잡한 문제를 풀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한다고 밝혀졌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특히 이런 멍때리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왜일까? 우리 사회는 업무와 공부 시간이 길고, 스마트폰과 디지털 기기에 하루 종일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출퇴근길 알림음, 회의, 숙제, 카톡, 뉴스, 쇼츠··· 뇌가 쉴 틈이 없다. 이렇게 뇌가 쉬지 않고 돌아가면 결국 과부하가 걸려
집중력도
떨어지고, 아이디어도 막히고, 피로와 불안이 몰려온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멍때리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방법은 어렵지 않다. 출근길에 이어폰을 빼고 바람과 소리에 집중하기, 카페에서 잠깐 눈 감기, 산책 중 멍하니 사람들 바라보기, 책상 앞에서 커피잔만 바라보며 숨 고르기 등 단 5분 정도의 시간이면
충분하다. 또한 특별한 도구도 필요 없다. 일상에 짧은 쉼표 하나만 찍어주면 된다. 오늘 하루, 잠깐 눈을 감고 머릿속을 비워보자. 의외로 그 짧은 5분이 “아하!” 하는 순간과 새로운 영감을 가져다줄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