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에서 K-무비로

글. 조한기(영화평론가, 경희대학교 학술연구교수)

일러스트. 이혜리

광복 80년, 한국 영화사는 시대와 함께 호흡해 온 문화사의 축적된 기록이었다. 한국 영화는 관객과 희로애락을 나누며, 해방의 환희와 전쟁의 상흔, 산업화와 민주화, 그리고 글로벌 한류의 흐름까지 담아왔다. 스크린은 때로 사회의 모순을 비추는 거울이었고, 때로는 미래를 향한 상상력의 통로였다. 오늘은 그 가운데에서도 광복 이후 한국 영화가 걸어온 길에 주목해 시대와 함께 변화해 온 궤적을 살펴보고자 한다.

광복 전후, 영화로 기록된 시대(1945~1950년대)

해방 직후, 독립·해방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 잇따라 제작·상영됐고, 오늘날 연구사에서는 이를 ‘해방기 영화’로 분류한다. 대표적으로 최인규의 〈자유만세〉(1946)가 있다. 이 작품은 한동안 해방 후 첫 영화로 회자됐으나, 현재는 〈의사 안중근〉과 〈똘똘이의 모험〉에 이은 세 번째 개봉작으로 정리된다(앞선 두 작품의 필름은 현존 미확인). 세 작품이 공통으로 보여주는 바는, 당시 스크린이 독립운동과 해방의 환희를 중심 주제로 삼았다는 점이다. 〈자유만세〉는 일부 필름이 남아 있어 해방 직후의 정서와 멜로드라마·활극의 장르 감각을 확인할 수 있는 드문 자료이며, 감독의 친일 전력은 해방의 환희와 식민 잔재가 공존하던 현실을 드러낸다.

1950년 6·25전쟁은 산업 기반을 무너뜨렸지만, 스크린은 폐허 위에서 다시 일어섰다. 박남옥의 〈미망인〉(1955)은 한국 최초 여성 감독의 연출작으로, 전후 사회에서 여성의 생존·욕망·돌봄을 정면으로 다뤘다. 이어 한형모의 〈자유부인〉(1956)은 여성의 사회 진출과 도시적 소비문화, 보수적 도덕관의 충돌을 포착해 당대 대중적 파장과 논란을 동시에 낳았다. 같은 시기 〈피아골〉(1955)을 둘러싼 금지·해금 논란은 이념 대립과 검열 압력이 영화의 내용·표현을 어떻게 규정했는지 보여준다. 한편 〈시집가는 날〉(1956) 같은 작품은 전통과 근대의 긴장을 희극적 문법으로 다루며, 급격한 도시화와 생활양식의 변화를 가시화했다.

첫 번째 황금기와 영화적 자의식(1960년대)

1960년대는 미학·장르·해외 교류가 동시에 확장된 시기였다. 유현목의 〈오발탄〉(1961)은 전후 현실을 날카롭게 포착한 작품으로, 1963년 샌프란시스코국제영화제에 초청되어 해외에 소개되며 한국 영화의 존재감을 높였다. 같은 해 강대진의 〈마부〉(1961)는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은곰상(심사위원특별상)을 수상해 한국 영화 최초의 주요 국제상 기록을 세웠다. 장르의 스펙트럼도 넓어졌다. 신동헌의 〈홍길동〉(1967)은 한국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으로 자리매김하며 자국 서사를 애니메이션 형식으로 정립했고, 권철휘의 〈월하의 공동묘지〉(1967)는 공포 장르의 대중성을 확인시킨 대표작으로 회고된다.

산업적으로는 신상옥이 1960년에 설립한 신필름이 전속 배우·촬영소·후반 시설을 아우르는 기업형 스튜디오 시스템을 구축해 ‘황금기’의 제작 기반을 떠받쳤다. 신필름은 1960년대에 100편이 넘는 작품을 제작했고, 〈빨간 마후라〉(1964) 같은 대형 장르물을 통해 규모와 기술력을 과시했다.

억압과 틈새, 그리고 세계의 시선(1970~1980년대)

1970년대는 국가 검열과 영화법 체제 아래 기획·시나리오 단계부터 통제가 강화된 시기였다. 그 속에서 영화는 우회와 암시, 풍자의 틈새를 찾았다. 하길종의 〈바보들의 행진〉(1975)은 유머와 풍자로 청년 세대의 좌절과 반항을 포착하며, 상업 멜로드라마와 사회 현실 사이의 접점을 넓혔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 이른바 ‘3S’(Sports·Screen·Sex) 기조가 오락성을 부추기며 검열의 초점을 이동시킨다. 야간 통행금지 해제 이후 성인물·청춘물이 활발해지고, 〈애마부인〉(1982) 등 상업 장르가 세분화된다. 홈비디오 보급과 극장 외 유통의 확대는 관람 환경을 바꾸었고, 산업은 억압과 상업화 사이에서 생존 전략을 조정했다.

그리고 한국의 새로운 영화적 운동이라 불리는 코리안 뉴웨이브가 부상한다. 1987년 민주화 국면과 제도 변화 속에서 박광수의 〈칠수와 만수〉(1988), 박종원의 〈구로 아리랑〉(1989), 장선우의 〈성공시대〉(1988) 등이 사회 현실을 전면에 두고 장르 문법을 재구성했다. 1984년 설립된 한국 영화아카데미(KAFA)는 이 흐름을 이끌 새 세대를 배출하며 기반을 제공했다. 이 흐름은 세계의 시선과도 맞물렸다. 임권택의 〈씨받이〉(1987)로 강수연이 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으면서 배우와 작가주의 영화에 대한 국제적 관심이 높아졌다. 국내 검열 체제와 상업 논리를 넘어서 표현의 영토를 확장할 수 있음을 확인시킨 사건이었다.

산업구조 개편과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도래(1990년대)

1990년대는 검열 중심의 생존 전략이 산업 중심의 성장 전략으로 전환된 시기였다. 할리우드 직배와 스크린쿼터 논쟁이 ‘한국 영화 살리기’를 촉발했고, 대기업 자본의 진입으로 기획·제작·배급·마케팅이 체계화됐다. 멀티플렉스의 확산과 부산국제영화제(1996) 출범은 관람 환경과 산업 인프라를 동시에 바꿔 놓았다. 김의석의 〈결혼 이야기〉(1992)는 기획영화의 출발점으로 거론되며 도시 생활감각과 타깃 마케팅을 결합했다.

이 시기 특히 코미디가 두드러졌다. 〈투캅스〉(1993), 〈넘버3〉(1997), 〈조용한 가족〉(1998), 〈주유소 습격사건〉(1999) 등은 패러디·언어유희와 범죄·청춘 서사의 혼합으로 이전 세대와 다른 도시적 감수성을 만들었다. 〈미술관 옆 동물원〉(1998),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1998) 같은 로맨틱 코미디는 중산층 일상과 연애를 가볍고 세련된 톤으로 포착해 관객층을 넓혔다. 광고·뮤직비디오식 빠른 호흡과 캐릭터 중심 대사가 상업 코미디 전반의 리듬을 규정했다.

말미에는 대작 시스템이 가시화됐다. 강제규의 〈쉬리〉(1999)는 남북 대립을 접목한 첩보·액션으로 600만 관객을 돌파하며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가능성을 입증했다. 장르 영화의 흥행 공식과 멀티플렉스 기반의 배급·마케팅 역량이 결합하면서, 1990년대는 장르의 폭과 산업의 스케일이 함께 커진 시기로 정리된다.

국제 영화제 수상과 영화제와 ‘천만 관객’ 시대(2000년대)

2000년대는 한국 영화가 유수의 국제 영화제와 국내 극장에서 동시에 성취를 거둔 시기였다. 임권택의 〈취화선〉(2002)이 칸 감독상을, 박찬욱의 〈올드보이〉(2003)가 이듬해 칸 그랑프리를 받으며 해외 프로그래머와 씨네필의 관심이 본격화됐다. 영국의 타탄 아시아 익스트림 같은 전용 배급 라인과 DVD 컬트, 시네마테크·대학의 회고전이 맞물리며 ‘찾아보는’ 한국 영화 팬덤이 서구권에 자리 잡았다.

국내에선 이른바 ‘웰메이드’ 흐름이 자리 잡았다.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2003), 김지운의 〈장화, 홍련〉(2003) 등은 장르와 미학을 결합해 관객층을 넓혔고, 강우석의 〈실미도〉(2003)는 한국 최초의 천만 관객을 돌파했다. 〈태극기 휘날리며〉(2004)가 뒤를 이었고, 〈괴물〉(2006)은 대형 VFX와 흥행을 동시에 끌어올렸다. 이 시기 국내 영화의 시장 점유율은 안정적으로 50% 안팎을 유지하며, 상업 규모·제작 기술·마케팅 전문화가 함께 성숙했다.

요컨대 2000년대는 예술성과 상업성이 동반 상승하고, 해외의 제도권 영화제와 씨네필 문화가 한국 영화를 지속적으로 호명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이 축적은 2010년대의 세계적 도약을 떠받치는 탄탄한 기반이 됐다.

세계화와 장르 확장의 성취(2010년대)

2010년대는 장르의 스펙트럼이 넓어지고, 해외 영화제와 글로벌 흥행이 동시에 가속화된 시기였다. 연상호의 〈부산행〉(2016)은 칸 영화제 미드나이트 스크리닝에 초청되어 주목을 받았고, 전 세계에서 9,000만 달러 안팎을 벌어들이며 한국형 좀비·재난 장르의 경쟁력을 입증했다.

특히 봉준호의 〈기생충〉(2019)은 칸 황금종려상에 이어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국제장편영화상까지 석권하며 한국 영화의 세계사적 위상을 결정적으로 끌어올렸다. 같은 해 김보라의 독립영화 〈벌새〉는 베를린국제영화제 세부 섹션 그랑프리(Generation 14plus)를 포함해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서 27관왕을 기록하며 예술적 다양성과 독립영화의 저력을 증명했다. 동시에 해외 수상 스펙트럼도 넓어졌다. 박찬욱의 〈아가씨〉(2016)는 한국 영화 최초로 BAFTA 비영어영화상을 수상해 작가주의 장르영화의 국제적 존재감을 재확인했다. 국내 시장에선 〈명량〉(2014)이 1,760만 명으로 역대 최다 관객 기록을 세웠고, 〈신과 함께〉 시리즈(2017~2018)는 잇따라 1,000만 관객을 넘기며 대형 프랜차이즈의 가능성을 입증했다. 산업 구조도 변화했다. 2017년 〈옥자〉의 칸 경쟁 진출은 글로벌 스트리밍 플랫폼이 제작·유통 지형을 바꾸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OTT 시대와 K-무비의 미래(2020년대)

2020년에는 팬데믹으로 극장 관객이 급감했지만, OTT가 한국 영화의 새로운 창구로 부상했다. 〈오징어 게임〉(2021)·〈지옥〉(2021)·〈지금 우리 학교는〉(2022)은 영화 출신 창작진의 역량이 스트리밍에서 확장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다. 형식은 다르지만, 그간 한국 영화계가 축적한 미학과 노하우가 유의미하게 이어진 결과로 볼 수 있다. 다양한 지표가 가리키듯 30여 년간 지속돼 온 한류는 해외에서 확고한 팬층을 형성했고, K-드라마와 K-무비를 비롯한 K-스토리콘텐츠는 ‘믿고 보는’ 브랜드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K-팝 데몬 헌터스〉(2025)는 한국적 코드와 글로벌 자본·제작 시스템의 결합이라는 초국적 협업을 보여주며 K-컬처의 영향력을 확인시켰다.

극장은 〈범죄도시 3〉(2023)·〈서울의 봄〉(2023)·〈파묘〉(2024)로 점진적 회복 신호를 보인다. 그렇다고 과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관객 회복의 비대칭과 흥행 양극화 완화, 중·저예산 라인업의 안정적 유통, 플랫폼-제작사 간 공정한 수익 분배와 시청 데이터의 투명성 확보가 여전히 중요하다.

이제 K-무비는 국내 관객을 넘어 세계의 팬들과 호흡하며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한다. 타문화를 존중하면서도 보편성에 안주하지 않고, 이야기의 고유함과 날카로움을 지켜낼 때 비로소 K-무비는 세계 속에서 더욱 빛날 것이다. 지난 80년간 그랬듯, 스크린은 앞으로도 시대의 모순을 비추는 거울이자 미래를 여는 상상력의 통로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