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 VOL.128

깊은 상흔 속에 뿌리 내린
강인함과 숭고함, 폴란드

바르샤바에 흐르는 쇼팽의 선율은 어떤 고난에도 숭고함을 지켜내는 폴란드인의 자존심이다.

글. 정효정(여행작가)

역사 속, 단단하게 뿌리내린 폴란드의 자주국방 정신
중부 유럽의 심장, 폴란드

폴란드의 인구는 약 3,800만 명, 국토 면적은 대한민국보다 3배 정도 크다. 폴란드어 국가명은 폴스카(Polska)인데 평원을 뜻하는 옛 슬라브어 폴리에(Polie)에서 기원한다. 실제로 폴란드 국토의 90% 이상이 평원이다. 평원이 많다는 건 그만큼 윤택하다는 의미겠지만, 한편으론 주변국의 침략을 방어하기 어렵다는 뜻도 된다.

심지어 그 주변국이 독일과 러시아 등 강대국들이었다. 덕분에 폴란드의 운명은 늘 기구했다. 1795년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에 의해 국가가 분할 통치되며 폴란드는 지도에서 사라졌다. 123년 후인 1918년, 겨우 독립을 쟁취했으나 그 기쁨은 불과 20여 년 만에 끝났다. 1939년, 독일이 그단스크를 공격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이었다. 독일이 폴란드의 서쪽 국경을 침범하자, 깜짝 놀란 소련은 폴란드의 동쪽 국경으로 진격했다. 그렇게 두 강대국에 의해 분할 점령당한 폴란드는 제2차 세계대전 내내 전 국토가 전쟁터가 되다시피 했다.

폴란드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유럽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본 국가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폴란드는 40여 년간 소련의 위성국이 되어 공산주의 치하에서 자유를 억압받았다. 소련이 해체된 지 8년 후인 1999년, 폴란드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한다. 당시 폴란드뿐 아니라 냉전시대 바르샤바조약기구 가맹국이었던 헝가리와 체코가 함께 나토에 가입했다. 이렇게 냉전이데올로기에 맞춰 양분됐던 국제 질서는 새롭게 재편되게 된다.

지난해, 폴란드는 우리나라에서 124억 달러 규모의 무기를 수주한 바 있다. K2전차, K9자주포, FA-50경공격기 등이 그 대상이다. 그동안 나치 독일, 스탈린 치하의 소련을 겪은 폴란드인들에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주는 시사점은 클 수밖에 없다. 늘 주변 강대국에 치여 왔던 역사 속에서 결국 이들이 믿을 수 있는 건 자주국방밖에 없지 않을까. 어쩌면 대한민국이야말로 폴란드의 심정을 가장 잘 이해하는 나라일지도 모른다.

어부와 인어의 사랑이 도시가 되다, 바르샤바 구시가

바르샤바 여행은 구시가에서 시작한다. 구시가 광장 중심에는 칼과 방패를 들고 있는 이색적인 인어 동상이 있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먼 옛날 발트해에는 두 인어 자매가 살았다고 한다. 이 중 한 인어는 덴마크의 코펜하겐으로 떠났고, 한 인어는 폴란드의 비스와강으로 향했다. 그 인어의 이름이 샤바다. 샤바는 비스와강에서 바르라는 어부와 만나 정착했는데, 이들의 결합으로 생겨난 지명이 바르샤바, 그리고 이들의 자손이 지금의 바르샤바인들이다. 이 인어는 바르샤바를 수호하는 존재로, 도시 곳곳에서 인어 문양을 볼 수 있다. 구시가에는 성 십자가 교회, 바르샤바 로얄 궁전, 바르샤바 국립박물관, 바르샤바 대학 등 주요 관광지가 모여 있어 한 번에 둘러보기 좋다.

중세 분위기가 물씬 나는 구시가를 돌아보다 보면 폴란드인이 얼마나 자신들의 역사와 전통을 사랑하는지를 알 수 있다. 사실 이곳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85% 이상이 폐허가 된 곳이다. 하지만 폴란드인들은 이탈리아 출신 화가 카날레토의 그림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도시를 복원했다. 방문하는 곳마다 새로 재건된 곳이지만 그렇다고 방문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역사와 전통을 이어받고자 하는 이들의 노력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정도로 그 가치를 인정받기도 했다.

바르샤바에 있는 성 십자가 성당과 코페르니쿠스 동상

쇼팽의 7,500여 점 소장품을 보유한 프리데릭 쇼팽 박물관

바르샤바의 숭고한 자존심, 폴란드

폴란드는 쇼팽이 사랑한 조국이다. 그는 1810년 바르샤바 근교의 작은 마을인 젤라조바 볼라에서 태어났다. 그땐 이미 폴란드는 삼국 분할로 지도에서 사라졌을 때다. 쇼팽은 바르샤바에서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음악을 공부했고, 이후 파리로 떠나 음악적 전성기를 맞았다. 하지만 쇼팽은 3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고향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폴란드 민족 영웅의 귀환을 두려워한 프로이센 당국의 방해가 있었기 때문이다. 쇼팽은 죽기 전 그의 심장을 고국에 묻어 달라 유언했다. 전해지기론 쇼팽의 여동생이 그의 심장을 유리병에 담아 몰래 바르샤바로 옮겼다고 전해진다. 지금 그의 육체는 파리 페르라세즈 공원에, 그의 심장은 바르샤바 성 십자가 성당의 기둥 안에 안치되어 있다.

바르샤바 쇼팽 박물관을 방문하면 쇼팽의 자필 악보와 편지 등 그의 생전 흔적을 관람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쇼팽이 살았던 시대와 작품을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멀티미디어 자료를 만날 수 있다. 그리고 바르샤바에서 54km 떨어진 젤라조바 볼라에선 쇼팽의 생가를 방문할 수 있다. 꼭 박물관이나 생가가 아니더라도 바르샤바 곳곳엔 쇼팽의 음악으로 가득하다. 대표적으로 바르샤바에는 쇼팽의 삶의 궤적을 따라 만든 15개의 쇼팽 벤치가 있는데, 이 벤치에 앉아 버튼을 누르면 쇼팽의 음악이 흘러나온다. 그리고 5월부터 9월 사이의 일요일에 바르샤바 와지엔키 공원을 방문하면, 쇼팽 동상 아래에서 개최되는 무료 쇼팽 콘서트를 만날 수 있다. 탁 트인 공원에서 폴란드의 전통음식인 피에로기를 먹으며 실력 있는 피아니스트들의 공연을 감상해보자.

조경 예술가들이 많이 거주하는 카지미에슈 돌니

중세 분위기가 물씬 나는 구시가를 돌아보다 보면 폴란드인이
얼마나 자신들의 역사와 전통을
사랑하는지를 알 수 있다.

중세로의 시간여행, 크라쿠프

크라쿠프는 폴란드 제2의 도시다. 16세기 바르샤바로 수도를 옮기기 전 이곳은 500여 년간 폴란드의 수도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도시의 대부분이 파괴된 바르샤바와 달리 크라쿠프는 중세의 건축물이 훌륭하게 보존되어 있다. 사실 보존의 배경은 아이러니하게도 이곳에 당시 독일군 사령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크라쿠프 역시 구도심에서부터 여행을 시작한다. 700년도 넘은 요새 바르바칸에 서면 이미 중세로의 시간여행이 시작된다. 말발굽 모양의 옹성의 내부를 보며 당시 성벽 수비의 모습을 상상해보기도 좋다. 이곳에서 바벨성까지 이르는 길은 왕의 길이라 불린다. 왕이 행차할 때 다녔던 길이기 때문이다. 바벨성을 방문하면 옛 귀족들의 보물을 감상하거나 무기고, 주거지역, 왕의 집무실 등 중세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어 마치 중세에서 하루를 보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를 찾아

바벨성을 지나면 크라쿠프의 유대인 거주 지역인 카지미에슈를 가볼 수 있다. 이곳은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배경이 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나치 독일이 유대인을 학살한 아우슈비츠(Auschwitz)가 바로 크라쿠프 근교에 있다. 그곳으로 향하는 유대인들의 이송 집결지가 이 카지미에슈에 있는 게토 영웅 광장이다. 이 광장은 주인 없는 빈 의자 조형물들이 서 있어 당시 유대인들이 느꼈을 슬픔과 공포가 전해진다.

카지미에슈를 지나 비스와강을 건너면 오스카 쉰들러의 공장이 나온다. 이 공장은 유대인 1,200명의 목숨을 구했던 독일의 사업가 ‘오스카 쉰들러’가 실제로 운영한 공장이자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실제 촬영지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살아남은 유대인들은 쉰들러에게 금이빨을 녹여 만든 반지를 선물한다. 그 반지에는 ‘한 사람의 구함은 세상의 구함이다’는 탈무드의 격언이 새겨져 있었다. 그 반지를 받은 쉰들러는 오열한다. 자신이 차를 팔거나, 나치당원의 배지를 팔았으면 더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었을 거라는 자책감에서 오는 눈물이었다. 그는 이미 1,200명의 세상을 구했지만 그럼에도 더 많은 사람을 구하지 못했음을 가슴 아파했다.

폴란드 여행을 하다 보면 저절로 인간이란 무엇이고, 우리가 결국 마지막까지 지켜야하는 가치는 무엇이냐는 의문이 든다. 인간은 때론 무지하고 악하다. 하지만 인간은 여전히 숭고하고 아름답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켜야 하는 가치는 무지하고 악한 인간들이 짓는 죄에서, 우리 주변의 선량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을 구하고 지키는 것 아닐까. 폴란드를 여행하며 우리가 지닌 강인함과 숭고함을 떠올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