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하인드

잊힌 전차:

프랑스의 전차 이야기

하나의 무기가 탄생하기까지 다양한 우여곡절이 존재한다.
무엇 하나 사연 없는 무기체계는 없다. 다양한 무기체계의 뒷이야기를 소개한다.
그 처음은 초창기 전차의 역사를 이끌었지만 단지 최초라는 타이틀을 놓쳐 명성을 얻지 못한 프랑스 전차다.

글. 남도현(군사칼럼니스트)
행사장에 등장한 Mk-V 전차

초창기 전차의 역사를 이끈 프랑스

영국은 1916년 8월 Mk-Ⅰ를 전투에 투입하면서 세계 최초로 전차를 만들고 사용한 나라가 됐다. 에베레스트를 이야기할 때 항상 에드먼드 힐러리와 텐징 노르가이가 언급되는 것처럼 최초는 의미가 상당한 기록이다. 무기의 세계도 마찬가지여서 전차 역사를 논할 때 영국은 항상 먼저 언급되는 영광을 누리고 있다. 개발 당시에 독일을 속이기 위해 사용한 탱크(Tank)라는 암호가 전차를 뜻하는 단어가 됐을 정도다.

하지만 초창기 전차의 역사를 실질적으로 이끈 나라는 프랑스다. 슈나이더(Schneider) CA1의 데뷔가 조금 늦어서 최초라는 타이틀을 놓쳤을 뿐이지 프랑스제 전차가 전차 여명기에 더 많은 흔적을 남겼다. 당시 영국이 조금씩 성능을 개량한 Mk 시리즈만 선보인 것과 달리 프랑스는 다양한 종류의 전차를 개발해서 사용했다. 대표적으로 360도 회전이 가능한 포탑을 최초로 장착한 FT는 전차의 기본 프레임을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시대를 초월할 만큼 성능이 좋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전에 없던 무기인데다 급하게 만들어 투입하다 보니 문제가 있는 것이 오히려 당연했다. 당대 전차 중에서 가장 강력한 75mm 포를 장착한 생샤몽(Saint-Chamond)도 그러했다. 해당 주포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활약한 독일, 미국, 소련의 유명 전차들에 탑재된 75~76mm 전차포의 뿌리였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공격력만큼은 가히 시대를 선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생샤몽도 여타 전차와 마찬가지로 제1차 세계대전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참호전 때문에 탄생했다. 상대 진지를 향해 돌격하다가 많은 병사가 기관총 세례에 죽어나가는 지옥 같은 일상이 이어지자 이를 타개하기 위한 수단의 등장은 필연이었다. 오랫동안 떨어져서 교류하지 않고 살아왔어도 유동식을 먹기 위한 도구로 모두가 예외 없이 숟가락을 사용하게 된 것과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워낙 전선의 상황이 급하다 보니 영국과 프랑스는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이 신무기 개발에 착수했다. 그런데 영국은 신무기가 지상에서 움직이는 전함이라고 보고 당시 해군 장관인 처칠이 이끄는 지상함위원회가 개발을 주도했다. 국가의 주도로 프로젝트를 진행한 영국과 달리 프랑스는 개념 연구를 육군이 하고 이를 바탕으로 요구 사항을 제시하면 개발은 민간 업체가 담당하는 방식을 택했다.

단지 첫 번째가 아니어서

연구에 나선 프랑스 육군은 10명 내외의 병력을 탑승시켜 적진까지 이동하는 중전차와 쾌속으로 전선을 돌파하는 경전차로 나누어 전력화를 결정했다. 이때 기술적 난도가 높은 중전차의 개발은 슈나이더와 FAMH에 각각 의뢰했다. 공급 측면, 특히 전시라는 상황을 고려하면 하나로 통일하는 것이 당연히 옳지만, 이전에 없던 무기다 보니 어느 것이 좋은지 알 수 없었고 개발 실패의 가능성도 컸기에 택한 궁여지책이었다.

명령을 받은 두 회사 모두 미국 홀트(Holt)의 농업용 트랙터를 기반으로 연구를 진행했다. 해당 트랙터는 이미 야포 견인용으로 사용하고 있었기에 주행력은 입증된 상태였다. 여담으로 이후 독일이 만든 최초의 전차인 A7V도 같은 트랙터를 기반으로 개발됐다. 그런데 홀트와 먼저 기술 공여 협정을 맺은 슈나이더가 무상으로 기술을 제공하지 않겠다고 FAMH에 통보했다. 아무리 전시라도 기업의 이익이 우선이었던 것이었다.

격분한 FAMH은 독자 개발에 나섰다. 경쟁자인 슈나이더가 자기들이 만든 엔진을 탑재할 것이 확실하므로 보다 강력한 파나르(Panhard) 엔진을 심장으로 선정했다. 궤도는 홀트 트랙터를 참조함과 동시에 기관차용 전기식 조향 장치를 결합해서 성능을 향상시켰다. 엔진으로 발전기를 작동시켜 발생한 전기로 움직이는 하이브리드 시스템이어서 변속기가 필요 없고 좌우 구동축을 따로 움직여 방향 전환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거기에다가 앞서 언급처럼 강력한 75mm 포를 탑재해서 슈나이더 CA1보다 전반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1917년 5월에 벌어진 최초의 실전 결과는 대단히 실망스러웠다. 엔진의 힘이 부족한 데다 무한궤도가 작아서 험지에 빠지면 탈출에 어려움을 겪었고 그러다가 독일군의 공격을 받고 격파되고는 했다. 비록 그해 말 벌어진 말메종 전투에서 선전했으나 함께 투입된 FT 경전차의 활약상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렇다고 영국, 독일 전차의 성능이 뛰어났던 것도 아니었다. 사실 당시의 기술 수준을 고려할 때 초창기 전차들의 성능은 거기서 거기였다. 그럼에도 영국의 Mk 시리즈는 단지 먼저 데뷔했다는 이유만으로 지금도 명성을 길이 전하고 있는 반면, 오히려 후대 전차에 더 많은 영향을 준 생샤몽은 존재 여부도 모르는 이가 부지기수다. 어쩌면 무기의 세계도 한때 유행한 우스갯소리처럼 일등만 기억하는 세상인지 모르겠다.

공개 행사에 등장한 생샤몽 전차 8인치 곡사포를 견인 중인 홀트 트랙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