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사 속 인물

신라의 홀로서기를 이룬

눌지마립간

신라 천 년 역사를 대표하는 왕이 누군지 물어보면, 어떤 이는 법흥왕이나 진흥왕을
또 어떤 이는 태종 무열왕이나 문무왕을 말한다. 한국 역사 최초의 여왕이었던 선덕여왕을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의외로 눌지마립간(재위 417∼458)을 말하는 이는 흔치 않다.
신라의 19대 왕으로 재위한 그는 고구려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군분투한 인물로
이후 신라 발전의 초석을 놓은 인물이었다.

글. 박건호(역사작가)  
일러스트. 김성삼

고구려의 신라 구원과 호우명 그릇

눌지마립간이 왕에 오르기 전이었던 그의 아버지 17대 내물마립간 때의 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내물마립간은 김씨 성으로 왕위에 오른 첫 번째 왕이자 ‘마립간’이라는 칭호를 사용한 첫 번째 왕이기도 했다. 그가 즉위한 지 40여 년이 지난 399년, 신라에 왜가 대규모로 쳐들어왔다. 국가적 위기에 빠진 내물마립간은 당시 우호국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그 요청에 화답하여 400년 광개토대왕은 5만 명의 구원군을 파견하여 신라에 침입한 왜를 격퇴한다. 이로써 신라는 외침을 극복하게 됐지만, 국제 관계에 공짜는 없는 법이다. 이후 고구려는 적들이 다시 침략할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신라 땅에 상당수의 병력을 주둔시킴으로써 신라에 대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경주 김씨의 시조 김알지의 후손, 이찬 대서지의 아들 실성이 고구려에 볼모로 가게 된 것도 그런 이유였다. 또한 고구려에 갔던 실성이 내물마립간 사후 왕위에 올랐는데(18대 실성마립간), 내물마립간의 아들 눌지가 있었음에도 실성이 즉위한 배경에는 고구려의 힘이 작용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고구려는 신라의 왕위 계승에도 일정한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400년 고구려의 신라 구원 직후의 양국 관계는 좋게 말해 혈맹관계였고, 나쁘게 말하면 주종관계였다. 호우명 그릇은 당시 이러한 양국 관계를 잘 보여주는 유물이다. 해방 직후인 1946년 경주 호우총에서 출토된 이 그릇의 밑바닥에는 ‘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十(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이라는 총 16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을묘년(에 제작한) 국강상 광개토지호태왕(을 기념하여 만든) 열 번째 그릇’이라는 뜻이다. 을묘년은 광개토대왕이 죽은 후 3년이 되는 415년으로 추정된다. 그릇에 새겨진 글씨는 광개토대왕릉비문과 같은 예서체로 당시 고구려가 주로 사용했던 글씨체인 점으로 미루어보아 고구려에서 제작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렇다면 이 광개토대왕을 기리는 그릇이 왜 신라 무덤에서 나온 것일까?

당시 신라는 사실상 고구려의 속국상태였다. 그러므로 신라를 국가적 위기에서 구해준 상국(上國)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은 국가적 은인이었다. 그런 광개토대왕이 38세의 나이로 죽었다. 서기 412년, 신라를 구원해준 지 12년이 되는 해였다. 학자들은 고구려에서 광개토대왕의 왕릉에서 거행된 큰 제사를 기념하기 위해 이 그릇을 만든 것으로 본다. 상상력을 가미해 당시 상황을 재구성하면 대략 이렇다. 광개토대왕이 죽은 후 고구려는 대왕의 제사를 속국 신라에 알렸고, 신라는 신하국의 예를 다하기 위해 사절을 보냈을 것이다. 고구려는 제사 의식에 참여한 조공국 사절들에게 기념품으로 이 그릇을 주었는데, 이때 신라 사절도 그릇을 받아 경주로 가져왔고, 그 그릇은 세월이 흐른 다음 누군가의 무덤에 묻힌 것이다.

눌지마립간, 반고구려 자주화를 감행하다

400년 고구려의 도움으로 외침을 극복한 신라에 대한 고구려의 영향력은 한 세대 이상 이어졌다. 이런 상태에서 반고구려 자주화의 움직임이 꿈틀대기 시작한 것은 내물과 실성에 이어 417년 왕위에 오른 눌지마립간 때였다. 눌지마립간은 먼저 즉위 이듬해 박제상을 고구려에 보내 그곳에 인질로 가 있던 동생 복호를 데려왔다. 당시 신라가 이렇게 고구려의 자기장에서 벗어나고자 시도한 것은 고구려의 내정 간섭도 근본 원인이 됐지만, 고구려의 평양 천도도 중요한 원인이 됐다. 당시 고구려 장수왕은 427년 기존의 수도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함으로써 본격적인 남진 정책을 추진한다. 이에 긴장한 백제가 먼저 신라에 손을 내밀었고, 눌지는 백제가 내민 손을 잡았다. 이것이 433년 ‘나제동맹’의 결성이다. 이 나제동맹은 교과서에서 ‘고구려의 남하에 맞서 신라와 백제가 손잡았다’라는 식으로만 설명될 수 있는 그런 평면적 사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랜 고구려의 속국이었던 신라가 고구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자주성을 회복하기 위한 도전이자 모험이었다. 분명 눌지마립간에게는 큰 결단이 필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부의 의지가 외부의 굴레를 혁파하는 데까지는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 신라가 고구려에 대해 적대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는 것은 나제동맹 후로부터 17년이 지난 450년부터였다. 이해에 있었던 우발적 사건은 두 나라의 관계에 심각한 균열이 발생했음을 보여준다.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450년 실직(지금의 강원도 삼척) 인근의 들에서 고구려 변방 장수가 사냥을 하고 있었는데 신라의 하슬라(지금의 강릉) 성주 삼직이 군사를 이끌고 나와 그들을 공격해 살해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 사실을 보고받은 장수왕은 크게 노하여 군사를 일으켜 신라 변방을 침공했는데, 눌지마립간이 겸손한 말로 사과하니 고구려군은 결국 말머리를 돌렸다. 아직 국력이 미약했던 신라가 한발 물러나 사과함으로써 갈등은 일단 봉합됐던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는 점차 악화되어갔다. 눌지마립간 39년인 455년 고구려가 백제를 침범했을 때, 신라는 아예 군사를 보내 백제를 도와주기도 했다. 460년대 이후에는 양국 간 본격적인 군사 충돌이 이어졌고, 이에 발맞추어 신라는 고구려의 공격을 막고자 변경지역에 많은 성을 쌓기도 했다.

경주 호우총에서 발견된 호우명 그릇

‘수탉을 죽여라’

433년 나제동맹이 체결된 상황 속에서도 신라는 한동안 고구려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었다. 450년의 고구려 변방 장수를 죽인 사건 이후 양국의 적대적 관계는 점차 그 정도를 더하게 되는데, 이런 상황에서 결국 양국 관계의 완전한 파탄을 결정짓는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신라가 깊은 밤 야음을 틈타 신라 땅에 주둔하고 있던 고구려 군대를 기습 공격하여 몰살한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이때의 작전명이 ‘수탉을 죽여라!’였다. 고구려 군인들의 복장에서 특이한 점은 모자에 꽂힌 새 깃털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신라인들이 고구려 군인을 뜻하는 속어로 쓴 말이 ‘수탉’이었다. 이 ‘수탉 죽이기’는 우리 기록에는 없고 《일본서기》에 나오는데, 웅략(雄略) 8년 2월의 내용이다.

···(신라 땅에 주둔하던) 고구려 군사
한 사람이 잠시 나라로 돌아갔는데, 이때 신라인을 전마(典馬, 마부)로 삼았다.
그가 돌아보며 “너희 나라는 우리나라에 의해 망할 날이 머지않았다”라고 말했다.
전마는 이를 듣고 거짓으로 배가 아프다고 하고 물러나서 뒤에 있었다.
그리고 자기 나라로 달아나 들은 바를 말했다.
이에 신라왕이 고구려가 거짓으로 지켜주는 줄 알고,
사신을 보내 급히 나라 사람들에게
“사람들은 집안에서 기르는 수탉을 죽여라”라고 명했다.
나라 사람들이 곧 그 뜻을 알고 나라 안에 있는
고구려인을 모두 죽였다.

-《일본서기》 웅략(雄略) 8년 2월

이렇게 신라는 자국 내의 ‘수탉’은 모조리 죽임으로써 고구려와 완전히 갈라서게 된 것이다. 여기서 하나 따져볼 것이 있다. 일본 역사에서 ‘웅략 8년’은 464년인데, 이때의 신라왕은 자비마립간(458~479)이라는 점이다. 그는 눌지마립간의 아들로 눌지마립간을 이은 왕이었다. 그러나 우리 학계에서는 ‘수탉 죽이기’를 자비마립간보다는 눌지마립간 때, 즉 연도로는 대략 450∼454년에 일어난 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왜냐하면 고구려와 관계 단절을 시작한 왕이 눌지마립간이고, 눌지마립간 때 이미 여러 차례 고구려와 전투를 치르는 등 관계가 험악해졌는데, 자비마립간 때까지 고구려 군대가 신라 왕도에 주둔할 수 있었겠느냐는 의문 때문이다. 어쨌든 ‘수탉을 죽여라!’라는 작전명으로 감행된 신라 왕도에서의 이 참극은 두 세대 가까이 이어져 왔던 고구려와 신라의 주종관계가 청산되는 결정적 사건이었다. 신라인들에게는 수탉을 죽이던 그 시간은 신라인들에게는 가슴 뛰는 축제의 달밤이었을 것이고, 고구려인들에게는 치욕의 달밤이었을 것이다.

눌지마립간은 이런 담대한 도전을 통해 아버지 내물마립간 때부터 이어져 온 고구려의 속박에서 벗어나 신라의 홀로서기를 이룩한 인물이었다. 국력이 약할 때 외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외세가 자신의 정체성을 훼손할 정도로 간섭할 때 신라인들은 분연히 그 외세에 맞섰던 것이다.

이런 홀로서기가 가능했기에 신라는 이어지는 6세기 진흥왕 때의 대외 팽창이 가능했고, 또 그를 이은 7세기 삼국통일 완수도 가능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