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여행

과거와 현대의 시간이 교차하는 섬

강화도

과거 강화도는 치열했던 군사 요충지였다. 섬을 따라 촘촘하게 들어선 54개의 돈대가
이를 증명한다. 과거와 현재가 어우러진 강화도를 찬찬히 둘러본다.

한양의 최전선이었던 강화도

강화도는 서울의 한강, 개경의 예성강, 그리고 남과 북을 가르는 임진강이 모두 만나는 곳이다. 고려의 수도 개경, 조선의 수도 한양과도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 그래서 강화도는 외세가 바닷길을 통해 침입한다면 수도가 위험해지는 곳이다. 이러한 지리적 특성으로 강화도는 몽골의 침입, 병인양요, 신미양요, 강화도 조약 등 근현대사에서 세계열강의 침략을 많이 받았다. 현재는 북한과의 접경지역이기도 한 강화도의 해안에 많은 돈대가 세워진 이유도 여기에 있다.

조선시대 강화도에는 5개의 진, 7개의 보, 54개의 돈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진과 보는 해안가에 설치된 대대급 군사 군사시설이며, 보는 중대급 규모로 운영됐다. 진과 보의 하위 개념으로, 해안가의 높은 평지에 돌과 흙을 쌓아 설치한 소규모 방어 시설이 돈대다. 돈대의 역사는 조선 숙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강화도는 지금과 달리 육지와 연결되지 않은 섬으로서 천혜의 요새였다. 숙종 4년에 영의정 허적이 외적의 침입을 대비해 돈대 설치를 건의했고, 이듬해 병조판서에 의해 공사가 시작됐다. 영종 때까지 총 53개의 돈대가 설치됐으며, 19세기 중엽에 추가된 용두돈대를 포함해 총 54개의 돈대가 완성됐다. 돈대가 주로 설치된 곳은 중국에 인접한 서해보다는 김포를 바라보는 동해의 염하를 따라 촘촘하게 들어서 있다. 바다를 통한 외적보다는 내륙에서 오는 침입에 대한 방어를 고려했기 때문일 거라고 추측된다. 각 돈대는 지역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축조됐다.

들쑥날쑥한 해안선을 따라 설치된 많은 돈대 중 초지진과 좌강돈대를 찾았다. 김포 대곶면에서 이어지는 강화초지대교를 건너 처음 만난 초지진은 상처투성이의 돈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초지돈대는 한강을 통해 수도 한양으로 들어가는 첫 번째 관문이기 때문에 조선의 최전선이었다. 초지진은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해군, 신미양요 때 미국 해병대, 그리고 일본 군함인 운양호의 공격을 받았다. 마지막 운양호의 공격으로 일부 성벽과 문만 덩그러니 남은 초지진을 1973년 보수공사를 통해 일부만 복원되어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초지진으로 들어서기 전, 두 그루의 커다란 소나무가 인상적이었다. 약 400년의 수령을 지닌 소나무들은 전쟁에서 입은 포탄의 상흔을 간직하고 있다. 소나무를 뒤로 하고 성곽을 따라 걸으니 갯벌의 서해와 초지대교를 볼 수 있다. 한 바퀴 둘러보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초지진에서 대룡시장으로 향하는 길을 따라 북쪽으로 약 10km 올라가면 용진진이 나타난다. 밭과 민가 사이에 있는 용진진은 병마만호의 관리 하에 11명의 병력이 주둔했다고 전해진다. 용진진도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거치며 석축은 사라지고 홍예문만 남았다. 1999년에 문루인 참경루와 좌강돈대를 복원했다. 참경루 성벽을 따라 오르면 좌강돈대와 연결된다. 둥근 모양의 좌강돈대는 조성 당시에는 네모난 모양이었다. 좌강돈대에는 바다를 향한 포좌 4개소가 있다. 바다를 바라보면 강화대교가 한눈에 들어왔다. 좌강돈대는 초지진에서 보이던 성가퀴가 보이지 않았다. 방어를 어떻게 했을지 궁금했는데 원래 36개의 성가퀴가 있었지만, 복원되지 않았다고 한다. 아쉬울 따름이다.

옛 기억의 향수가 살아있는 대룡시장

한양에서 바다로 가장 서쪽에 있는 섬인 교동도는 고려의 희종과 조선의 연산군이 유배로 생의 마지막을 보낸 곳이다. 또한 안평대군, 임해군, 능창대군, 숭선군 등 조선시대의 많은 왕족이 유배 생활을 한 장소이기도 하다. 강화도보다 더 고립된 섬이었던 교동도에 가기 위해서는 다리를 건너야 한다. 2014년 교동대교가 개통되기 전까지는 월선포선착장에서 강화도로 드나들어야 했다. 교동도는 민간인 출입 통제선 안에 있는 곳이기에 입도하기 위해서는 신분증이 필요하다. 이곳은 황해도 출신의 실향민들이 많이 살던 곳이다. 망원경 없이도 북한의 연백평야를 볼 수 있어 자연스럽게 이곳으로 모였던 것이다.

대동도에서 떠오른 장소는 대룡시장이다. 6·25전쟁 시기 황해도에서 월남한 실향민들이 휴전 이후 북으로 돌아가지 못해 머물면서 고향 시장인 연백장을 본떠 만든 골목시장으로, 교동도에서 농사를 지을 땅이 없는 사람들이 생계수단으로 시장에 모였다. 힘겹게 터전을 가꿔온 실향민 1세대가 하나둘 세상과 작별하면서 활기를 잃어가던 시장은 교동대교 개통 이후 새로운 변화를 맞이했다. 1960~1970년대의 옛 시장 모습을 간직한 대룡시장을 보기 위한 관광객의 방문으로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300m 정도의 골목길을 들어서면 마치 옛 시장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30분도 채 되지 않아 둘러볼 수 있는 이 골목에는 삐거덕거리는 낡은 가게와 칠이 벗겨진 간판, 색 바랜 포스터, 요즘은 잘 보이지 않는 검정 고무신, 그리고 촌스러움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표주박 등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방앗간, 찻집, 문방구, 시계방, 떡집, 양복점, 사진관, 이발관 등 정직한 한글로 표시된 가게들. 하나둘 발길 닿는 대로 몸을 맡겼다. 두툼한 호떡, 방송에서만 보던 초란 올라간 쌍화차, 쫄깃한 꽈배기 등의 다양한 주전부리가 시시때때로 유혹했다.

베틀 소리 들려오는 강화도

과거 1970년대까지 강화도에서 성행했던 사업은 직물산업이었다. 강화도와 직물이 연결되지 않는 듯하지만, 강화도의 여성들이 부업으로 소창을 짜기 시작하면서 그 역사가 시작됐다. ‘남자는 밭을 갈고 여자는 베를 짠다’는 사자성어인 ‘남경여직’이 강화도에서 비롯됐다고 하니, 여인들의 손재주가 가히 드높았나 보다. 여인들이 짜기 시작한 소창은 아기 기저귀나 베갯잇, 행주 등으로 많이 사용되는데, 목화솜을 실로 만든 후 씨실과 날실을 평직으로 엮은 직물이다. 강화에서 생상된 소창은 23수의 가는 실로 만들어지며, 이는 솜 1g으로 23m 길이의 실을 뽑아낸 것이다.

1910년대부터 발달하기 시작한 직물사업은 직물조합이 만들어질 정도로 확산됐고, 우수한 품질로 ‘강화소창’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졌다. 한때는 130개 정도의 소창공장이 있었지만, 나일론과 일회용품의 발달로 소창의 수여가 줄어들었다. 인조직물 생산 공장이 대구로 옮겨가면서 강화의 직물사업은 쇠퇴하게 됐다. 현재 강화도에는 가내 수공업 형태로, 일곱 군데 정도에서 소창의 명맥만 이어가고 있다.

이렇게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는 소창이 천연소재를 선호하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다시 인기를 얻고 있다. 이런 소창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곳이 소창체험관이다. 한옥과 평화직물 공장을 정비해 만든 이곳은 소창과 관련한 다양한 체험을 제공한다. 전시관, 소창 스탬프 체험관, 기념품 전시장, 직조 시연 등이 마련되어 있으며, 문화관광해설사에게 소창의 역사와 궁금한 점을 들을 수 있다. 다도관인 1938한옥에서는 따끈한 메밀차도 제공되어 한옥에 앉아 차 맛을 보는 즐거움도 누릴 수 있다. 소창 위에 스탬프를 찍어 손수건을 만드는 체험도 가능하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건 과거 직물공장에서 실제 사용했던 직조기 두 대에서 경쾌한 기계음을 내면서 소창을 생산하는 모습이었다.

소창체험관에서 도보로 3분 거리에 있는 동광직물생활문화센터도 빼놓을 수 없는 방문지다. 과거 소창공장이었던 동광직물을 새롭게 단장한 동광직물생활문화센터는 소창 제조 전 과정을 볼 수 있는 장소다. 이곳의 매력은 커다란 공장 건물에 드리워진 소창들, 그리고 실이 감긴 실패들이 모여 만든 패턴이 마치 하나의 조형 작품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강화도는 과거 수도 방위의 최전선이자 지방 조세물들의 뱃길이었다.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에서 흘러나온 퇴적물로 생긴 습지와 조수간만의 차로 형성된 드넓은 갯벌을 지닌 강화도는 우리 역사에서 빼놓지 않고 등장한 중요한 땅이다. 돈대, 대룡시장, 소창 외에도 고인돌, 전등사, 고려궁지 등 다양한 역사가 숨 쉬는 곳이 있다. 가까운 듯하면서도 멀게 느껴지는 강화도를 넉넉한 시간을 잡고 떠나보는 건 어떨까?

여행 중 쉼표, 먹기

젓국갈비를 아시나요?

강화도 앞바다에서 잡히는 젓새우는 전국 생산의 70% 이상을 차지할 만큼 예부터 유명했다. 갯벌이 발달해 새우가 서식하기 좋은 환경과 민물이 바닷물과 섞여 젓새우가 담백하면서도 달짝지근한 맛을 낸다. 이러한 젓새우에 돼지갈비, 두부, 호박 등이 곁들여져 끊인 탕국이 바로 젓국갈비다. 웬만해서는 돼지갈비가 이름의 중심이 될 법한데 젓국을 강조한 이유는 아마 새우젓이 차지하는 중요도가 높기 때문일 것이다. 젓갈 특유의 맛이 날 것으로 예상하고 먹었는데 생각보다 담백하다.

시장의 묘미는 군것질

대룡시장의 대표 군것질은 강아지떡이다. 이름을 보고 개떡을 떠올리기 쉽지만, 엄연히 다른 떡이다. 개떡은 보릿가루로 만들고, 강아지떡은 갓 지은 찹쌀반죽에 팥을 넣어 만든 떡이다. 결국 찹쌀떡이다. 하지만 그 이름에는 사연이 있다. 일제 강점기에 군량미를 수탈하기 위해 떡과 술이 금지됐고, 사람들은 자식들에게 떡을 먹이기 위해 하찮게 이름을 붙였던 것이다. 갓 나온 쫄깃한 식감이 매력적이다. 이 외에도 초란이 올라간 쌍화차, 참기름병커피, 호떡 등 먹거리가 즐비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