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왕(武王) 하면 보통 서동요 전설의 주인공인 백제 무왕을 떠올리기 쉽다.
한국사에는 백제 무왕 말고도 한 명의 무왕이 더 있었다. 발해 무왕(武王)으로 본명은 대무예(大武藝)였다.
왕명에 들어간 ‘武(무)’자를 통해 짐작할 수 있듯이, 그는 8세기 전반 수많은 전쟁을 통해
발해 영토를 크게 확장한 인물이다. 그 과정에서 무왕은 당시 세계 최강이었던 당과 충돌한
두 번의 전쟁을 모두 승리로 이끌었다.
글. 박건호(역사작가)
일러스트. 김성삼
발해 무왕과 당의 갈등
발해는 698년 대조영이 동모산에서 건국한 나라다. 이는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뒤 한 세대만의 일로, 발해 고왕(高王) 대조영은 고구려 계승의식을 분명히 했다. 건국 후 20여 년이 지난 719년 대조영이 죽고,
그 뒤를 이어 즉위한 이가 무왕이다. 즉위 후 그는 발해 주변의 여러 나라에 대한 정복 사업을 벌였다. 이런 발해의 세력 확장을 예의주시하던 당나라는 726년 발해 북방에 있던 흑수말갈족과의 연결을 통해 발해를
견제하고자 했다.
발해 무왕은 즉각 왕자를 당나라로 보내 당의 조치에 항의했다. 그러나 당 현종은 이를 무시했다. 이에 무왕은 동생 대문예로 하여금 출병해 흑수말갈을 치도록 했다. 그러나 당시 당나라는 세계 최강대국이었다.
흑수말갈과의 국경지역까지 나간 대문예는 흑수말갈과의 전쟁이 당과의 전면전으로 확대될 수 있고, 이는 국가 존망의 문제라 판단하고 당나라로 망명해 버린다. 당시 당 황제 현종은 대문예를 크게 환영하고 벼슬을 하사했다.
격분한 무왕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대문예를 처형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당 현종은 이 요구를 거절하며, 친형이 동생을 죽이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타이르는 한편 동생 대문예를 발해의 왕으로 세울 수도 있다는
일종의 협박성 서한을 보내온다. 흑수말갈을 둘러싼 외교적 갈등이 대문예 송환을 둘러싼 갈등으로 확대된 것이다. 이런 양국의 갈등 속에서 무왕은 대담한 결단을 내린다. 당을 선제공격하는 것이다.
당나라를 공격한 사건, 등주성 전투
무왕은 장문휴 장군에게 당 침공의 책임을 맡겼다. 732년 9월 드디어 출격 명령이 내려졌다. 발해 수군 함대는 바다를 건너 등주성(현 산둥성 펑라이 시)으로 진격했다. 당시 등주는 북방지역에서 가장 큰 항구로
무역의 거점이었을 뿐만 아니라 당 수군의 거점이었다. 732년 9월 5일 장문휴가 이끄는 발해군은 순식간에 등주성을 점령하고, 등주 자사 위준마저 죽였다. 기습 공격은 대성공이었다. 발해의 기습 공격을 보고받은 당
현종은 급히 지원군을 보냈지만 발해군의 기세를 꺾지 못했다. 당시 발해 수군의 상륙전이 당나라에 끼친 피해는 매우 컸다. 《신당서》에는 당시 발해군의 침공으로, 성읍이 도륙됐고, 많은 유민과 실업사태를 일으켜 등주가
완전히 파탄이 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발해의 기습 공격에 당황한 당나라는 나당전쟁 이후 서먹한 관계였던 신라를 끌어들였다. 전형적인 이이제이(以夷制夷: 오랑캐로 오랑캐를 제압한다) 전략이었다. 현종은 신라 성덕왕에게 국서를 보내 “발해는 밖으로
제후국이라 하면서 안으로는 교활함을 품고 있어서 이제 군사를 동원해 죄를 묻고자 하니, 그대도 군사를 징발해 발해 남쪽 변방을 공격하도록 하라”고 요청했다. 이에 당시 당과의 관계 개선을 원하던 성덕왕은 733년
1월 김유신의 손자 김윤중으로 하여금 출병해 발해 남쪽을 공격하게 했다. 그러나 눈이 10척이나 넘게 내리고 산길이 험준해서 군사 절반이 얼어 죽자 중도에 포기하고 되돌아오고 말았다. 그러나 이런 원정 실패가 완전히
헛된 것은 아니었다. 신라는 이 원정을 통해 당으로부터 대동강 이남 지역에 대한 신라의 영유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을 뿐만 아니라 당과의 외교관계를 나당전쟁 이전 관계로 회복할 수 있었다.
지상전으로 치러진 마도산 전투
신라의 발해 공격이 실패했다는 소식에 당 현종은 발해를 직접 치기로 결심하고, 대문예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이에 대응해 무왕은 대문예를 암살하기 위해 그가 머무는 낙양으로 자객들을 보냈으나, 암살 작전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무왕의 분노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제2차 당나라 침공전에 나섰다. 당의 침략이 이미 충분히 예견되는 상황에서 이를 회피하기보다는 오히려 선제공격을 선택한 것이다. 733년 발해군은 거란과 연합해 만리장성을 지척에 둔 마도산으로 진격했다. 등주성 공격이 수군을 이용한 것이었다면, 이번에는 지상전이었다. 또 등주 공격과는 달리 이번에는 무왕이 직접 친정에 나서 진두지휘했다. 《신당서》 오승자전은 이때의 상황을 이렇게 짧게 기록하고 있다.
“발해 무왕 대무예가 군사를 이끌고 마도산에 이르러 성읍을 점령했다.”
발해의 공격에 당나라는 북방 지역 군사력을 총동원해 방어에 나선다. 《자치통감》에는 당시 당이 발해의 침공에 얼마나 긴장했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이 있다.
“대문예를 유주로 보내 군사들을 징발케 해 싸우게 하는 한편 유주절도사로 하여금 ‘하북채방처치사(북쪽 국경 수비대 총사령관 정도의 직책)’를 겸하게 하고 상주, 낙주, 패주, 기주, 위주 등 16개 주에 이르는 주와 안동도호부의 병력까지도 통솔케 했다.”
그러나 당은 북방 17개 지방의 병력을 다 동원하고도 발해군을 막지 못했고, 발해는 당나라의 만리장성까지 진출했다. 이에 당나라는 추가 병력을 투입해 400리에 걸쳐 참호를 파고 돌을 쌓아 발해의 공격을 가까스로
저지할 수 있었다. 이 전쟁에서 당군은 큰 손실을 보았다. 《구당서》에서는 당군 6,000명, 《신당서》에서는 당군 10,000명이 전사한 것으로 기록한다.
등주성 전투와 마도산 전투가 끼친 영향은 생각보다 컸다. 이 두 번의 원정은 발해가 비록 신생국이지만 절대 강대국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 결과 발해는 당시 동아시아의 강대국인 당나라도 쉽게
넘보지 못하는 동아시아의 새로운 강국으로 떠오르게 된다. 당은 발해의 내정에 쉽게 간섭하지 못했고, 무왕은 국정을 독자적으로 운영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무왕은 전쟁의 발단이 됐던 흑수말갈 정복을 마무리 짓고
후방을 안정화시킨다. 또한 안으로 당과의 두 차례 전쟁 후 수도를 중경 현덕부(현 길림성 화룡현 서고성)로 천도했다. 이곳은 3대 문왕 때 상경 용천부로 천도할 때까지 수도로 역할을 했다. 이러한 무왕의 강력한
대외정책과 이로 인한 외부 조건의 안정은, 3대 문왕이 발해의 체제를 크게 정비하고, 더 나아가 이후 9세기 ‘해동성국’으로 불리는 발해의 전성기를 만드는 기반이 됐다.
그러나 발해 무왕이 오로지 군사력만으로 당나라에 맞섰다고 하면 그건 오산이다. 국가 안보는 결코 군사력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무왕은 당시 당과 신라의 강력한 군사적 결속에 맞서 위로는 돌궐, 아래로는 일본 등과
연결함으로써 한편으로는 국제적 고립을 벗어나고, 또 한편으로는 당과 신라를 견제해 동북아시아에서 세력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특히 이때 형성된 발해와 일본의 우호 관계는 발해 멸망 때까지 이어지게
된다.
국가 안보는 군사력이라는 하드웨어와 영민한 외교라는 소프트웨어 모두를 갖추었을 때 확고히 보장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