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7월 8일은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출전시켜 거둔 첫 승리의 날이다. 오늘날 이를 ‘방위산업의 날’로 지정했다.
그렇다면 조선의 군수산업지대는 어디였을까? 바로 충무공 이순신의 얼이 서려 있는 통영이다.
한산도대첩의 전장이자, 삼도수군통제영이 있던 이곳이 조선 수군의 도시이자 군수산업 중심지였던 것이다.
하루 여행
조선의 군수산업지대 통영
충무공 이순신을 찾아서
통영, 조선 수군의 도시
통영 한산도는 원래 버려진 섬이었다. 한산도대첩을 치른 이듬해인 1593년 7월,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한산도 두을포에 진을 세웠다. 일본 배가 오가는 견내량과 한산도 바다를 봉쇄하기 위함이었다. 그해 선조는
수군통제사라는 직책을 새로 만들고, 이순신을 초대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하는 교서를 내린다. 삼도수군통제사는 경상·전라·충청도의 수군을 통할하는 해상 방어의 총수로, 오늘날 해군참모총장의 역할이나 다름없는 직책이었다.
이것이 통제영의 시작이다.
7년의 전란이 끝난 후 조선은 왜적에 대비하기 위해 통영에 성곽을 쌓고 삼도수군통제영을 설치했다. 본격적인 군사계획도시로서 통영이 만들어진 것이다. 통영이라는 지역명도 바로 이 삼도수군통제영에서 나왔다.
현재 통영시 문화동에 있는 삼도수군통제영은 1603년 6대 통제사 이경준 시절에 설영된 곳으로, 1895년 폐영될 때까지 조선의 해상 요충 사령부였다.
이곳을 방문하면 동피랑과 서피랑을 사이에 둔 통영항이 한눈에 보인다. 높은 건물이 없던 과거에는 더 잘 보였을 것이다. 삼도수군통제영의 중심 건물은 세병관(洗兵館)이다. 이순신 장군의 공을 기념하기 위해 지어진 이
건물은 앞면 9칸, 옆면 5칸으로 우리나라 목조건물 중 가장 큰 건물 중 하나다. 세병(洗兵)이라는 이름은 ‘은하수 물을 끌어와 병장기를 씻는다’라는 뜻으로 전란 없이 평화를 누리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당시, 통영은 군사 도시이자 군수산업의 중심지기도 했다. 조선의 수군이 집결되는 장소이다 보니 필요한 군수품 또한 많았다. 이에 조정은 전국 장인들을 이곳에 모이게 해 군수품을 만들게 했다. 그 시절에 군수산업지대가
생긴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통영에선 다양한 전통 공업이 발달하게 되고, 이후 통영에서 만들어진 물건은 품질이 좋은 것으로 여겨지게 된다. 지금도 통영은 국가지정 중요 국가유산과 기능공을 많이 보유한 도시로
손꼽힌다.
현재 삼도수군통제영에서는 나전칠기, 갓, 놋쇠, 부채, 은세공 등 당대의 12공방이 복원된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화폐를 주조할 수 있는 주전소 터도 남아있다. 조선 시대 화폐를 주조하는 곳이 몇 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해 보면, 당시 통영의 경제 규모가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추모하는 백성의 마음을 담아, 충렬사
영화 <명량>은 이순신 장군이 12척의 판옥선으로 133척의 왜선을 격파한 명량해전을 다룬 영화다. 누명을 쓰고 파면당했던 이순신 장군은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다. 거제도 앞 칠천량에서 원군이 이끌던
조선 수군이 궤멸한 직후였다. 밤잠을 못 이루며 고뇌하는 그에게 아들이 묻는다. “아버님은 왜 싸우시는 겁니까?” 아들 입장에선 아버지가 이해되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이에 대한 이순신 장군의 대답은 “장수된 자의
의리는 ‘충’을 좇아야 하고 그 ‘충’은 ‘백성’을 향하여야 한다”였다. 실제로 이순신 장군이 이런 말을 남기진 않았지만, 《난중일기》를 보면 그가 병사들과 피란민을 세세하게 돌보고 마음 썼음을 알 수 있다.
임금조차 백성을 버리고 피난을 가는 상황에 의지할 곳 없던 백성들이 이순신 장군을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순국하자, 조선의 백성들은 자발적으로 사당과 비를 세우기 시작했다. 지금도
이순신 장군을 모신 사당이 전국 여기저기에 있는 이유다. 통영의 충렬사도 이순신 장군을 모신 사당 중 하나다. 하지만 이곳은 다른 사당과 조금 다르다. 1606년 선조의 명령에 따라 창건했고, 1663년에는 현종의
현판을 받은 ‘국가 공인’ 사당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맨 처음 만나는 것은 붉은 살이 열 지어 서 있는 홍살문이라는 정문이다. 이 문은 정이품 이상의 신위를 모신 사당에서만 세울 수 있다. 정문을 지나 오른쪽을 보면, 국가유산으로 지정된 수령 400여 년의
동백나무가 있다. 강한루를 지나 올라가면 양옆으로 비각을 거느린 외삼문이 나온다. 이 문은 조선 후기 건축물 중 조형미가 빼어난 건물로 손꼽히는데, 광복 후에 대한민국 우표 도안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외삼문을 지나면 이번엔 높은 계단 위의 중문이 나온다. 중문 양옆에는 두 그루의 고목이 있는데 목련과의 태산목이다. 6월 호국보훈의 달이 되면 달콤한 꽃향기를 뿜어낸다. 꽃향기를 맡으면서 중문을 통과하면 이번엔
내삼문이 나온다. 내삼문은 다른 문에 비해 출입구가 낮다. 몸과 마음을 낮추고 이곳을 출입하기 위함이다. 그렇게 여러 문을 지나며 시끄럽던 마음을 가다듬은 후에야, 비로소 이순신 장군의 위패와 영정이 모셔져 있는
본전에 닿을 수 있었다.
참배를 마치고 나오는 길엔 잊지 말고 유물전시관을 들러보도록 하자. 이곳에는 명나라 황제 신종이 이순신 장군에게 내린 8가지 보물인 ‘명조팔사품’과 정조가 충무공전서를 발간하고 직접 지어 내린 제문 등을 볼 수
있다.
전쟁은 장수 혼자 할 수 없다, 이순신 공원
통영에서 이순신 장군을 만나는 마지막 여정은 이순신 공원이다. 서울 광화문에서도 매일 만나는 이순신 장군 동상이지만 이곳의 동상은 더 특별하게 느껴진다. 왼손으로 장검을 짚은 이순신 장군이 오른손으로 가리키는 곳은
한산도대첩의 전장이다. 동상 아래 기단에는 이순신 장군의 친필 휘호인 ‘죽고자 하면 살 것이요,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다(必死則生 必生則死)’가 적혀있고, 동상 아래 바닥에는 이순신 장군의 32전 32승 승전도가
새겨져 있다. 옥포해전부터 노량해전까지 전투의 흔적을 따라가다 보면 새삼 이순신 장군의 위대함을 느끼게 된다.
물론 전쟁은 장수 혼자 할 수 없다. 이순신 장군은 뛰어난 지략과 전략을 지닌 난세의 영웅이지만, 그의 곁에는 언제나 그를 믿고 따르며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거북선 및 각종 무기 제작 책임자였던 나대용부터
이순신 장군의 수하들, 배의 밑바닥에서 노를 저었던 격공들, 그리고 함선을 수리하고, 무기를 만들고, 식량을 준비했던 백성들까지, 이곳에 새겨져 있는 모든 전투에는 이순신 장군뿐 아니라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모두의 정신이 함께 서려 있었다.
여름의 이순신 공원은 수국으로 가득하다.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보라색 꽃들이 무리 지어 피어나고, 사람들은 꽃받침을 하며 인생샷을 남긴다. 평화롭게 공원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이야말로 우리 선조들이 지키고자 했던
모습이고, 우리가 후대에 물려줘야 할 모습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