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하인드

잠수함 공장이 인천에?

서울에 가까워 외세에 의해 강제 개항된 도시인 인천. 일제강점기 이곳에서 잠수함을 생산한 적이 있었다.

글. 남도현(군사칼럼니스트)

인천이 최초인 것들

현재 인천은 대한민국과 세계를 연결하는 관문이지만 1883년 개항 이후에서야 역사에 등장했다. 한적한 포구였던 제물포가 인천항으로 바뀌고 이곳을 중심으로 도시가 커간 것인데, 사실 인천은 자연 여건상 항구가 들어서기 부적합한 곳이다. 그래서 세곡선을 비롯한 선박들이 강화도 외곽과 한강 하구를 거쳐서 서울로 갔었다.

한마디로 인천은 서울에서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외세에 의해 강제 개항된 것이다. 비록 굴욕적이었지만 이후 인천은 급속히 성장했고 구한말에 이르러서는 영국, 러시아, 청, 일본의 영사관과 각국조계(各國租界)가 들어섰을 정도로 국제적인 도시가 됐다. 그래서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인천은 최초라는 타이틀이 유달리 많은 도시다.

선물거래소, 철도, 고속도로, 광역상수도, 등대, 기상대 같은 인프라와 공원, 호텔, 커피숍, 클럽, 극장, 워터파크, 박물관 같은 복리 시설이 한반도에 처음 설치됐다. 짜장면, 쫄면, 닭강정을 비롯한 많은 음식의 고향이며 축구, 야구도 인천을 통해 들어오며 역사를 시작했다. 거기에다 열차, 자동차, 성냥, 사이다 같은 다양한 생산 시설도 최초로 가동됐다.

덧붙여 의외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잠수함도 한반도에서 최초로 탄생했다. 전투용은 아니었으나 엄연히 군용으로 사용된 잠수정이 1940년대에 인천에서 만들어졌다. 일본 육군이 수송용으로 사용한 ‘3식수송잠항정(三式輸送潛航艇) 마루유(まるゆ)’가 바로 그 주인공인데, 이는 일제의 어처구니없는 발악과 수탈의 증거이기도 하다.

조선기계제작소에서 건조하다가 해방 이후 방치된 마루유 잠수정. 추가 발주된 3004~3007호로 추정된다.
©화도진도서관

일본 육군이 잠수함을 만든 이유

1942년 5월이 되자 일본은 서태평양을 석권했다. 그러나 지도상으로 그랬을 뿐이었다. 얼마나 많은 후속 조치가 요구되는지 몰랐기에 벌어진 과도한 팽창이었다. 결국, 각지에 고립되어 주둔하던 육군 부대들은 제때 보급받지 못해 고통을 겪었다. 더구나 1943년이 되자 지금까지 수송로를 지키던 일본 해군도 안위를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그러자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판다’는 말처럼 다급한 육군은 보급용 잠수함을 운용하겠다는 기상천외의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모든 조선소는 해군 물량을 만들기도 벅찬 상황이었다. 이에 육군은 육상에서 선체를 나눠 제작한 후 바닷가로 옮겨 조립하기로 하고 1943년 10월 도쿄 인근 안도철공소 (安藤鐵工所)에서 초도함을 건조해 시험에 들어갔다.

결과에 만족한 육군은 400척 보유를 목표로 1944년 1월부터 양산에 나섰다. 이때 물량을 조속히 확보하기 위해 인천에 위치한 ‘조선기계제작소(朝鮮機械製作所, 이하 조선기계)’도 생산처로 지정됐다. 참고로 조선기계는 해방 이후 한국기계, 현대양행, 대우중공업, 두산인프라코어를 거쳐 현재 HD현대인프라코어로 같은 곳에서 계속 가동 중이다.

1946년 말까지 1차분으로 히타치에 24척(0001급), 니혼제강에 9척(1001급), 안도철공소에 2척(2001급), 그리고 일본 본토가 아닌 조선기계에 3척(3001급)이 발주됐다. 그 때문에 조선기계에서 제작된 물량은 마루유 3001급으로 불린다. 구조나 성능의 차이는 없으나 3001급은 한반도에서 많은 자재를 조달하면서 곳곳에서 수탈이 벌어졌다.

1945년 9월에 촬영된 조선기계(현 HD현대인프라코어) 도크의 항공 사진. 4척의 마루유 잠수정이 건조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미 해군국립박물관

우리에게 아픈 역사

그렇게 제작된 3척의 마루유와 수송선으로 구성된 선단이 1944년 5월 23일 필리핀으로 첫 출항에 나섰다. 도중에 공격을 받아 여러 척의 수상함이 파괴됐던 반면 3척의 마루유는 50여 일의 항해 후 마닐라에 입항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보급한 물자는 필리핀 주둔군이 4~5시간이면 소모해 버릴 100여t에 불과했다.

전쟁을 경제적 효율만 따지면서 할 수는 없지만 단지 4~5시간 연명을 위해 잠수함을 만들고 격침의 위험 속에 수십 일간 항해한다는 것은 사실 상식을 벗어난 행위다. 아무리 해군과 사이가 나빠도 육군이 별도로 수송잠항대를 만들어 운용했다는 자체부터가 무리였다. 결국 많은 마루유가 무의미한 작전을 펼치다 쓸쓸히 최후를 맞았다.

어쩌면 종전으로 인해 생산이 적었던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일본에서는 ‘최후의 감투 정신’ 운운하는데, 한마디로 쓸데없는 헛발질이었다. 더구나 우리에게는 수탈의 흔적이었다. 그래서 한반도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잠수함은 그저 그런 흥밋거리가 아니라 우리에게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아픈 역사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