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고양시 삼송 신도시가 한창 개발 중이던 2008년 8월 경기도 고양시 오금동 우봉김씨 묘역에서
조선시대 역관 김지남(金指南, 1654~1718)의 묘가 확인됐다.
현재 김지남의 묘는 고양시 향토유산 51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김지남은 18세인 1672년 역과에 급제한 후 일본과 청나라를 오가며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 공을 인정받아 그는 지중추부사직에 오르고, 사후에는 역관으로서는 파격적으로 형조판서에 증직됐다.
김지남은 통역이라는 본업을 넘어 외교에서도
큰 공을 세웠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의 업적 중에는 ‘방위사업’과 관련된 것도 있다.
글. 박건호(역사작가)
일러스트. 김성삼
병자호란과 북벌의 꿈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던 그해 겨울은 혹독하게 추웠다. 인조 14년, 청나라 태종 홍타이지가 이끄는 10만 대군이 조선을 침략해 왔다. 정묘호란 종전 후 약 10년 만의 재침이었다. 국왕 인조와 신료들은
남한산성으로 피신해 들어갔다. 강화도는 이미 길목이 막힌 상태였다. 한양은 전쟁 발발 후 단 8일 만에 함락됐고, 산성 내에서는 연일 항전을 주장하는 주전파와 화의를 주장하는 주화파 사이에 설전이 이어지고 있었다.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결국 조선은 청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항복하기로 결정했다. 농성전을 시작한 지 40여 일만이었다. 갓에 철릭 차림을 한 인조는 삼전도에 설치한 수항단에서 홍타이지에게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항복
의식을 치뤘다. 음력 1637년 1월 30일, ‘삼전도의 굴욕’으로 기록된 이 날은 한국 역사상 가장 치욕스러운 날이었다. 그나마 나라가 망하지 않았음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전쟁의 고통은 민초들에게 훨씬 더
가혹했다. 포로의 몸으로 청에 끌려간 조선인들이 부지기수였다.
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재위 1649∼1659)은 즉위와 함께 ‘북벌(北伐)’을 표방했다. 군비확충과 군사력 강화를 통해 10년 안에 청을 정벌해 병자호란에 대한 복수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즉위 10년이 되던
해 효종이 갑자기 죽으면서 북벌의 꿈은 무산됐다. 효종 사후 북벌은 하나의 구호로 남게 됐고, 오히려 청나라를 배우자는 북학론이 점차 목소리를 키워갔다.
병자호란은 김지남 가정사에도 상처를 남겼다. 그의 아버지 김여의(金汝義)의 첫 번째 부인은 병자호란 때 강화에서 순절해 시신을 찾지 못했다. 김여의는 후에 함평 이씨와 재혼해 그 사이에서 지남을 낳았다. 김지남이
태어난 1654년은 북벌의 구호가 드높았던 효종 재위 중이었다. 김지남이 비록 병자호란과 북벌 추진을 직접 경험하지는 못했겠지만 병자호란 직후 북벌의 구호가 떠돌던 당시의 사회상은 그에게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방위사업의 선구자 김지남
김지남이 역과에 합격하고 통역관으로서의 활약을 했던 시기는 현종에서 숙종 때였다. 김지남은 통역관이라는 자신의 직분에만 머물지 않고, 중국어로 나라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섰다. 그리하여 청나라로부터
새로운 화약제조 기술을 입수해 국방력 강화에도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우리나라 방위사업의 선구자이기도 한 인물이 김지남이었다.
김지남은 1692년 청나라 수도인 연경(현 베이징)에 사신으로 가는 민취도(閔就道)를 수행했는데, 그의 권유로 자초법(煮硝法: 화약을 만드는 흙을 달이는 법)을 알아내기 위해 중국 요양의 어느 시골집에 찾아가
사례금을 주고 비법을 배우게 된다. 당시 청나라는 자초법을 군사기밀로 통제해서 이를 알아내기란 무척 어려웠고, 이를 배우는 것 역시 목숨을 걸어야 했다. 병자호란으로 조선은 청의 신하국이 됐지만, 조선에 신무기
기술이 흘러 들어가면 언제 조선이 청에 도전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꿈은 늘 쉽게 이루어지지 않은 법일까. 김지남에게 자초법을 가르쳐주던 중국인이 갑자기 병으로 죽어버렸다. 그는 자초법을 다 배우지
못한 채 조선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김지남은 이듬해 다시 진하사(進賀使) 일행으로 청나라에 갔고, 그 뒤에도 역관으로 중국을 방문할 때마다 조금씩 정보를 수집해 결국 비법을 알아냈다. 지금으로 비유하자면
가상적국으로부터 핵무기 기술을 빼낸 것과 다름없는 쾌거였다. 그러나 그를 지원하던 민취도가 평안도관찰사로 전근되어 더 이상 진척을 보지 못했다. 그러던 중 1698년 병기창고 도제조 남구만의 지시에 따라 2년 동안
실험 끝에 자초법에 따른 화약개발을 최종 성공했다. 1698년에 관련한 내용으로 구성된 《신전자초방(新傳煮硝方)》을 출판했다. 《신전자초방》은 새로운 화약 제조 방법을 연구하여 그 비법을 기록하고 그 방법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자세히 기록한 책이다. 원래 조선에서 예부터 쓰던 염초 제조
방법은 민가의 부뚜막이나 뒷간 흙을 채취해 염초를 제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화약 제조량이 많지 않고 비용과 인력이 많이 들며 무엇보다 민폐가 심했다. 이에 김지남이 민가의 흙이 아닌 평범한 길바닥 흙을 사용하는
방법을 도입했다. 화약 제조 공정도 기존의 14단계에서 10단계로 줄여 재료 부담 없이 좀 더 쉽고 많이 만들 수 있게 했다.
또한 이전까지 조선에서 쓰이던 화약이 밀가루 같은 분말 형태의 가루형이었던 반면 이 책에 수록된 화약은 최초의 알갱이형 화약으로, 같은 분량의 가루형 화약에 비해 폭발력이 150% 더 강했다.
게다가 금방 습기에 상해버리던 과거의 화약과는 달리 새로 개발된 화약은 땅 밑에 10년을 두어도 습기에 변질되지 않고, 흙과 재도 예전의 3분의 1밖에 들지 않아 자주국방과 국가 재정에 큰 도움을 주었다. 훗날
정조는 이 자초법에 대해 ‘금석(金石)과 같은 성헌(成憲)’이라고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말로써 백두산 국경을 매듭짓다
김지남의 활약은 백두산정계비를 세우는 과정에서도 빛났다. 숙종 37년(1711년)에 조선인이 국경을 넘어가 인삼을 캐다가 다섯 명의 청나라 사람을 살인한 일이 계기가 되어 청이 두 나라의 경계를 조사해 비석을 세울
것을 요청했다. 이를 위해 오라총관(烏喇摠管) 목극등(穆克登)이 수십 명의 수행원을 이끌고 1712년 2월 조선을 방문했다. 조정에서는 박권(朴權)을 접반사로, 김지남을 수역(首譯)으로 임명했다. 김지남의 아들
김경문도 통역관으로 임명되어 동행했다. 조선과 청의 대표들은 함경도 혜산에서 출발해 오시천, 서수라, 화덕, 지당을 거쳐 박봉곶에 도착해서 압록강 근원을 조사했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지역이었으므로 밀림과 벼랑,
강줄기 사이로 말 타고 갈 수 있게 길을 닦는 것만도 큰일이었다. 천지 가까이 오자 목극등은 연로하다는 핑계를 대며
조선 대표들을 떼어내려고 했다. 5월 6일 결국 접반사 박권과 함경감사 이선부(李善溥)는 결국 백두산 정상에 오르지 않기로 했다. 여기까지 따라온 이유가 정계비(定界碑)를 세우기 위한 것인데, 양반신분이었던 조선
대표는 빠지고 중인신분이었던 역관 김지남과 김경문 부자, 그 외 군관들이 청나라 조사관들과 함께 백두산에 올랐다. 접반사 박권이 빠진 상황에서 청과 대응할 수 있는 사람은 김지남 부자밖에 없었다. 목극등은 백두산
전역을 청나라의 영토로 확정지을 심산을 가지고 있었지만 김지남과 그의 아들 김경문은 ‘백두산 정상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압록강과 토문강 갈래를 이루므로 백두산 정상을 중심으로 양국의 국경을 정하는 것이 마땅하다’하며
그를 끈질기게 설득했다. 그 결과 1712년 임진년 5월 15일 천지 아래 남동쪽 4km 지점인 2,150m 고지에 정계비가 세워졌다. 이를 통해 청나라와 조선의 국경이 처음으로 명문화됐다. 비에는 양국 경계를
‘서쪽은 압록강이고 동쪽은 토문강’이라고 적었다.
김지남은 이 국경회담 당시의 일을 《북정록(北征錄)》으로 남겨 당시의 상황을 후대에 전했다. 《북정록》에 따르면
5월 5일 밤 목극등이 변경지역에 대한 정보를 묻자 김지남은 “장백산 꼭대기의 큰 호수 남쪽이 바로 조선의 경계입니다”라고 답했다. 출발 이튿날 목극등이 김지남도 제외시키자 김지남은 백두산 답사 뒤 지도를 그려 줄
것을 청했다. 이에 목극등이 “대국의 산천은 그림으로 그려줄 수 없지만, 백두산은 이미 그대들 나라 땅이니 그림 한 폭 그려주는 것이 어찌 어렵겠는가”라고 했다. 이런 김지남의 기지로 조선은 백두산 정계 당시 목극등
일행이 거쳐 간 경로와 정계비 위치가 그려진 소중한 지도 한 폭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정계비 건립 후 이 지도는 숙종에게 바쳐졌다. 김지남의 묘 앞에 세워진 묘지석 뒷면에는 당시의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기록되지 않은 흥미로운 내용이다.
지도를 바치자 숙묘(肅廟:숙종)는 이를 기뻐하며
그림 위에 다음과 같이 썼다.
“그림을 보니 오히려 장엄한데, 산에 오른 기상은
어떠했을까, 지난날 경계를 다투던 근심이,
이로부터 저절로 사라졌다네.
(繪畵觀猶壯 登山氣苦何 向時爭界慮 從此自消磨)”